니체 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 독일 레켄)
프리드리히 니체는 1844년 10월 15일 라이프찌히 근처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당시 국왕이던 프리드리히 대왕의 생일에 니체가 태어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그에게 국왕과 동일한 이름인 프리드리히 빌 헬름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교구 감독까지 지냈던 종교지도자로서 매우 활동적인 인물이었고, 목사인 니체의 아버지는 음악을 사랑하였으며, 예술가적인 기질을 가진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니체가 다섯 살 때 세상을 떠났고 그 후 어머니, 누이동생과 함께 나움부르크의 할머니 집으로 이사했다. 음악과 시를 좋아했고 이미 14세 때에 「나의 인생에서」라는 자전적 소품을 썼을 만큼 조숙했던 니체는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벌써 권위주의적인 모든 것에 저항적 태도를 보였으며, 학교 수업보다 그리스 철학 서적을 탐독하는 데 열중했고, 낭만적인 시에 심취하여 장 파울과 휠덜린의 시를 즐겨 읽었다.
니체의 생애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습관은 일기를 쓰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삶에서 가지게 된 다양한 관심들을 1858년부터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의 일기 쓰기를 통하여 심화시켰다. 일기 쓰기를 통하여 그는 자신의 고민을 해결하려고 노력하였으며 글쓰는 방식과 생각하는 방법을 습득하였다.
20세에 본 대학에 입학하여 고전 문헌학을 전공하게 되지만, 처음에는 공부보다는 술과 여자 등 쾌락을 좇는 생활을 했다. 그러나 곧 그런 생활에 혐오감을 느끼고 다시금 엄숙하고 고독한 생활로 돌아갔다. 본 대학 문헌학 교수였던 리츨 교수가 라이프찌히 대학으로 옮겨가자 니체 역시 친구 로데오와 함께 라이프찌히 대학으로 옮겨갔다.
이 라이프찌히 대학 시절, 그는 헌 책방에서 우연히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책을 사 읽고서 충격적인 감동을 체험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에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일은 쇼펜하우어의 소개로 음악가 리하르트 바그너와 개인적으로 알게 된 것이었다. 후기 낭만주의의 두 대표인 쇼펜하우어와 바그너와의 만남은 청년 니체에게 대단한 영향을 주었다.
어느 날 니체는 바그너 집의 벽에 걸린 '뮤즈들에 의해 길러진 디오니소스' 그림을 매우 심각하게 감상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디오니소스는 자연의 생산력을 상징하는 신이었으며, 또한 광란의 의식을 동반한 술과 도취의 신이기도 했다. 니체는 자서전에서 '나는 디오니소스의 제자이다' 라고 한 적도 있었다. 어쨌든 바그너의 음악은 니체 자신의 철학적 미래를 투영해 보여주는 대상이었다고 한다. 그가 최초로 발표한 『음악의 정신으로서 비극의 탄생』(1872)은 '바그너에게 바치는 글'이라는 헌사로 시작되고 있다.
이 시기에 니체는 자기 시대의 주지적(主知的) 문명에 저항감을 느껴, 희랍의 미적(美的) 예술적 정신을 옹호하면서 그것을 독일 문화와 결합시켜 새로운 게르만적 헬레니즘을 창조하고자 하는 낭만적 열정에 차 있었다. 그는 문화 유형으로서의 주지적인 것과 주정적(主情的)인 것, 로고스적인 것과 파토스적인 것, 아폴로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구분해 놓으면서, 희랍 문명은 주정(主情)보다 주지(主知)가, 파토스적인 것보다 로고스적인 것이, 디오니소스적인 것보다 아폴로적인 것이 우세한 위치를 차지함으로써 쇠퇴하게 되었다는 것을 암시했다.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문화적인 교훈을 이해했던 것은 쇼펜하우어와 바그너뿐이었다고 니체는 보았는데, 그러한 문화적 교훈을 그가 자기 시대의 주지적 문명에 적용시켜 비판한 것이 『반시대적 고찰』이란 책이다.
니체는 1879년 그는 25세의 나이로 바젤 대학 문헌학 조교수로 임명되었다. 바그너와 깊은 우정을 맺었다가 그에게 환멸을 느끼고 그와 완전히 결별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바젤 대학 교수로 있으면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간호병으로 지원하여 종군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이질과 디프테리아로 중병을 얻어 3개월이 채 못되어 제대하였고, 이 때 악화된 건강은 계속해서 그를 괴롭히게 되었다. 32 살 때는 눈병과 위장병이 악화되어 1년 간 요양을 하였다.
이 시기에 니체는 이전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서 철저한 회의주의자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는 바그너에게서, 현세의 삶을 부인하는 그리스도적 구원의 냄새가 나기 시작하는 것을 알고서 바그너적 낭만주의와 완전히 결별하게 되며, 자신이 이상화했던 모든 것들뿐만 아니라 기존의 모든 가치와 권위를 부정하고 파괴하며 특히 기독교에 대해서 노골적인 저항을 시도한다. 자유 정신으로써 새로운 가치들을 인간 자신으로부터 세울 것을 니체는 역설한다. "모든 언어는 편견이다"라고 정신의 자유에 있어서 언어의 위험을 언급하기도 했다. 이 때 발표한『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1878∼1879)은 그 부제(副題)를 '자유 정신을 위한 책'으로 달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책 자체를 합리주의자 볼테르에게 바쳤다. 『즐거운 지식』(1881-1882)에서 '신(神)은 죽었다'고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기존 가치와 권위와 이상을 철저히 부정했던 니체는 이후 현세의 삶에 뿌리를 둔 삶의 긍정적 면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사상을 가장 잘 요약해 주는 것이 그가 주장했던 영겁 회귀 사상, 힘에의 의지, 초인 등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권력에의 의지를 체현(體現)하는 초인이라는 이상을 향하여 끊임없는 자기 극복을 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1879년 나이 35세에 건강이 극도로 악화된 니체는 10년 간 강의해 왔던 바젤 대학 교수직을 사임했다. 발작이 그 해 한해 동안에 무려 118 회가 발생했다. 이후 약 10년 간을 이탈리아 해안가나 스위스 산중의 요양지를 전전하면서 병과 고독과 싸우는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런 중에서 1882년에는 이탈리아에서 루 살로메와 사귀기도 했다. 니체의 나이 37세이고 루 살로메의 나이 21세였다. 두 사람은 결혼에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5개월만에 헤어졌다. 루 살로메에게 니체가 구혼했으나 거절당했는데, 이 또한 그에게 하나의 충격을 주었다. "나에게 돌아오지 않으면, 나는 파멸이다." 혹은 "만약 당신이 나를 버린다면 당신의 문란한 생활을 폭로하겠소." 등의 구절이 루 살로메에게 보낸 니체의 편지 내용이다.
니체는 실연의 깊은 절망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생 일대의 역작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쓰게 된다. 니체는 이 책의 앞부분에서 ‘나는 그대들에게 초인을 가르치겠다. 인간은 초극되어야 할 어떤 것이다’라 하고 있다. 병과 고독과 싸우는 이런 생활 중에서도, 점점 더 원숙해져 가는 자신의 사상을 표현하고 싶다는 욕구는 그치지 않았다. 그리하여 진행성 뇌마비의 발병에 의해 정신 착란에 빠질 때까지 그 짧은 몇 년 동안 그는 자신의 무르익은 사상을 수많은 저술을 통해 쉴새없이 토해 냈다.
이 마지막 시기의 그의 저술들로서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선악을 넘어서』,『도덕의 계보학』,『우상(偶像)의 황혼』,『반(反) 그리스도』,『니체 대 바그너』등이 있다. 또 그의 사후에 누이 엘리자베드에 의해 정리 출판된 『힘에의 의지』가 있다.
그러나 결국 1889년 1월 튀린에서 니체는 정신병 발작을 일으켰다. 짐마차를 끌던 늙은 말이 채찍질을 당하자 그 말의 목을 잡고 울부짖다 길바닥에 쓰러져 정신병원으로 옮겨졌다. 며칠 뒤 혼수 상태에서 가까스로 깨어나기는 하나 이미 전의 그가 아니었다. 거리를 쏘다니며 마구 노래를 불러댔고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자신이 인간으로 변장한 신이라고 외쳤다. 누구에게나 알아볼 수도 없는 편지를 써서 끝에다 그리스도라고 서명해 부쳤다.
그로부터 11년 후인 1900년 8월 25일, 바이마르 정신 병원에서 결국 그는 가장 사랑했고 가장 친했던 누이 엘리자베드 곁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56 세였다.
니체가 보인 정신병이 매독으로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설이 있다. 신경매독(3 기 매독에 속한다)은 매독균이 뇌신경이나 척수신경을 침범해서 생기는 데, 특히 전신 마비형 (general paresis type)은 치매 (dementia)와 유사한 증상을 보이게 되는 수가 있다. 가령, 기억력 저하, 판단력 장애, 광적 행동 등이 나타나는 데, 이것은 일견 보기에는 정신병으로 오인되기 쉽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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