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보(杜甫/712-770)
두보는 하남성 공현 사람으로 몰락한 관료의 가정에서 자랐다. 조상은 대대로 유가(儒家) 사상에 기반하여 성실하게 현실에 참여했던 관리였다. 그의 선조 중에 명장(名將)이나 시인(詩人)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전반적으로 보아 부귀영화를 누렸던 집안이라기보다는 청빈(淸貧)한 생활을 유지했던 집안이었다. 그러나 두보의 경우에는 청빈의 정도가 심해져 그가 살다간 총 58년이란 세월은 실망과 방랑의 연속이었다.
대당제국(大唐帝國)은 초기에 태평성대를 누렸다. 그러나 두보는 과거 시험에 낙방했다. 벼슬길이 막힌 두보는 장안에 머물러 있었으나 생활이 점점 어려워졌다. 두보는 장안에서 가난에 시달리며 어려운 생활을 하는 가운데 집권자들의 호화롭고 사치스런 생활과 가난한 사람들이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는 처참한 광경을 직접 목격하였다. 이러한 사이에 두보는 자식을 굶겨 죽이기까지 하는 비참한 생활에 빠졌다.
결국 이곳 저곳을 떠돌아다니다 중년의 나이 44세에 말단 관직을 하나 얻어 겨우 연명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일 뿐, 현종(玄宗)이후 3대에 걸쳐 안록산의 난을 비롯하여 북방 이민족의 빈번한 침공으로 두보는 어느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가족들과 함께 전국 각지로 유랑하게 된다. 피난민들 속에 끼어 갖은 고생을 다하다가, 두보는 당 숙종이 영무에서 즉위했다는 소식을 듣고 임금을 찾아가다가 도중에 반란군에게 체포되어 장안으로 끌려가는 신세가 되었다.
장안은 벌써 반란군들의 손안에 들어가 있었다. 이듬해 간신히 장안에서 도망친 그는 숙종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숙종을 만났다. 당 숙종은 두보에게 좌습유란 관직을 주긴 하였지만 그를 중용하려 하지 않았다. 두보는 숙종에게 충언하다가 도리어 황제의 반감을 사 추방당하고 말았다. 또 다시 두보는 각지를 방랑하는 가운데 전란과 부역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고통을 직접 보고 들었다. 두보 자신도 초근목피로 연명하였다.
두보의 시가는 대부분이 안사의 난 때 백성들이 고통받는 모습을 쓴 것이다. 풍부한 문장력과 현실을 꿰뚫는 그의 시는 후세에 시를 통해 효현한 역사 즉 '시사(詩史)'라는 이름으로 널리 추앙받았다. 두보의 시에 담겨 있는 기쁨과 슬픔은 바로 당시 백성들의 기쁨과 슬픔이었던 것이다.
760년 봄에 두보는 완화리에 초당을 짓고 그곳을 주거지로 삼아 살았다. 현재 국보로 보존되는 '두보초당'이 바로 이 유적지이다. 두보는 49세부터 51세까지 3년 정도 이 초당에서 살았다. 너무나도 기복이 많았던 그의 인생에서 이 3년은 비교적 평온한 시기였다. 전란이나 기근이라는 좌절을 경험한 뒤에 얻은 평화였기 때문에 더욱이 소중했을 것이다. 어린 시절 친구였던 엄무(嚴武)나 고적이 이 지방에서 상당히 높은 관직에 올라 있었다. 두보는 그들의 도움을 받아 가족과 함께 잠시나마 평화로운 시기를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말년은 역시 처량하여 사천(四川) 지역과 호남성(湖南省) 호북성(湖北省)을 전전하다가 급기야 상강(湘江) 유역의 낡은 뱃전에서 쓸쓸하게 객사하고 말았다. 그의 나이 59세였다.
평생 가난과 신병(身病)에 시달렸던 두보는 장안(長安)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낙향하였을 때 굶어죽은 어린 아들의 모습을 목격하기도 했고 또한 걸식을 했을 정도로 가난에 찌들었지만, 전란(戰亂)을 통해 일반 백성들이 겪었던 고통을 그 어느 누구보다도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조국 산천을 방랑하며 아름다운 산하(山河)와 고통스런 현실 사이에서 생각의 깊이와 넓이는 더욱 깊어지고 넓어졌을 것이다. 이런 까닭에 두보(杜甫)의 시는 사실적이고 현실적이다.
두보의 시 세계는 전반적으로 보아 아무래도 암울한 분위기가 흐른다. 그의 작품에는 다른 작가의 작품에서 흔히 보이지 않는 단어가 수시로 등장한다. 아(餓)--배고픔, 반(飯)--음식, 밥, 육(肉)--고기, 포(飽)--포식...... 이런 글자를 많이 사용한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가난에 시달렸고 그러한 가난과 고통 그리고 실의(失意)에 대한 반발로 술을 찾았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술이라면 이태백을 떠올리는 것이 상식이지만 그러나 두보의 작품에도 역시 주(酒)자가 예상외로 많이 등장하고 있다. 술을 일컬어 고민을 없애주는 약이라 했거늘 이런 사실로도 두보의 침울한 심적 세계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두보의 작품은 왜 암울한 색채가 진하게 드리워져 있을까? 그의 내면적인 감정과 사상이 현실과는 너무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국과 동포, 가족과 형제 친지는 물론 고국 산천의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도 지극히 사랑했던 두보로서는 통곡할 지경인 현실과 심적 조화를 이룰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두보를 훌륭한 시인으로 평가하는 것은 이렇게 극심한 내적 갈등에 시달리면서도 침울한 인생을 근엄한 시적 형식(율시)과 예술적 기교로 주옥같은 작품을 빚어냈다는 데 있다.
중국 고전 정형시 중에서 가장 엄격한 율시(律詩). 그 율시의 성인(聖人)으로 추앙받는 두보는 가장 음악적이면서도 가장 제약적인 시 형식을 일부로 택해 고통스런 창작의 과정을 달게 밟고 지나갔다. 다음 구절 「성격이 괴팍하여 멋진 구절만 찾아 헤매니 / 독자가 보고 경탄하지 않으면 죽는 한이 있어도 쉬지 않으리」--- 爲人性僻耽佳句(위인성벽탐가구), 語不警人死不休(어불경인사불휴)---라고 스스로도 고백했을 정도로 두보는 멋진 구절을 찾아 고통스런 창작에 매진했다. 그의 이런 태도를 보게 되면 불현듯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든다. 두보에게 있어서 시 창작은 현실의 고통을 이길 수 있는 그런 원동력이 되지 않았을까? 시구(詩句)의 멋진 완성을 위해 탐닉하는 순간만은 현실의 고통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무아지경이 되지 않았을까? 두보에게 있어서 창작 활동은 현실의 고통을 초월할 수 있었던 자유이자 쾌감이었을 것이다.
그럼, 지금부터 작품을 몇 수 감상하면서 두보의 시 세계를 체험하기로 한다..
<春望-봄날 고국 산천을 바라보며>
고국은 엉망이어도 산천만은 의구하니 / 國破山河在,
온누리에 봄이 되어 초목이 무성하다 / 城春草木深.
시국이 어려우니 꽃을 봐도 눈물 나고 / 感時花?淚,
생이별 한스러워 새소리에도 가슴 저려 / 恨別鳥驚心.
전란(戰亂)에 휩싸인지 어언 석달째라 / 烽火連三月,
고향 편지 한통에 만금은 족히 되리 / 家書抵萬金.
흰머리는 긁을수록 자꾸만 빠져버려 / 白頭搔更短,
이제는 비녀조차 꽂기가 어렵구료 / 渾欲不勝簪.
전란으로 인해 초토화되어 버린 조국. 그곳에 사는 백성들의 생활이야 말해 무엇하랴. 그러나 춘하추동은 어김없이 돌아왔다. 봄이 되자 찢어진 산과 들에도 초목이 무성해지기 시작했다. 인간은 저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만도 못하단 말인가. 어렵게 쌓아올린 문명이며 문화가 일거에 무너져 버렸지 않는가. 그러나 자연은 때가 되면 아무리 혹독한 환경에서도 어김없이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킨다. 두보는 지금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조국 산천에도 봄이 와서 초목이 무성해진 모습을 물끄럼이 바라오고 있는 것이다. 아름다운 야생화, 즐거운 새소리. 호경기 때 보거나 들었더라면 그지없이 유쾌하고 한적했으리라. 그러나 지금은? 아리따운 꽃을 보아도 즐거운 새소리를 들어도 그걸 즐길 마음의 여유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꽃을 보니 오히려 눈물이 흐르고 새소리에도 가슴이 떨린다고 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바로 다음 구절, '이미 봉화(烽火)에 휩싸인지 석달째(봉화(烽火)는 유사시 사용했던 과거의 정보 통신수단)'에서 알 수 있듯이 전란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자신의 목숨도 부지하기 바쁜 판이니 멀리 떨어진 가족들의 안위를 어떻게 알아보겠는가. 그런 와중에서 고향에서 오는 편지가 자신에게 전달되었다면 그 편지의 가격을 어찌 가격으로 매길 수 있으랴. 그래서 만금(萬金) 가격이라 한 것이다. 우수(憂愁)에 젖은 중년. 이제 흰머리도 제법 머리를 덮기 시작했으리라. 고민이 깊어가니 머리카락을 자주 긁적인다. 이미 흰머리가 태반인 머리카락도 긁적일 때마다 한웅큼씩 빠져버려 비녀조차 꽂을 수도 없다는데서 우리는 두보의 처량한 신세, 어려운 시국, 가정의 위기 등 일련의 고통과 천연덕스러운 자연의 생명력이 대조되면서 당시 모습이 선연히 그려지고 있다.
이 작품 <춘망(春望)>의 창작 배경은 이렇다. 두보가 가족을 뒤로 하고 정부군에 합류하러 달려가던 도중 오히려 반란군에게 잡혀 장안으로 끌려갔다. 그때가 757년 봄. 안록산(安祿山)의 난이 발발한 지 2년 뒤, 여전히 시국이 불안하던 때였다. 포로로서의 극심한 고통과 불안감 속에 천지자연이 소생하는 봄을 맞이한 것이다. 오언(五言) 율시(律詩)의 대표작이다.
이어서 그 당시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작품 한 수를 감상하기로 한다.
<石壕吏--석호의 관리>
저녁 무렵 석호촌에 투숙하여 자려는데 / 暮投石壕村,
한밤중 관리가 사람 잡으러 나타났다 / 有吏夜捉人.
할아범은 담장 넘어 나 살려라 도망치고 / 老翁踰牆走,
할멈이 문을 열고 누군가 쳐다본다 / 老婦出門看.
관리가 소리치매 어찌 이리 화를 내며 / 吏呼一何怒,
할멈의 울부짖음은 어찌 이리 처량한고 / 婦啼一何苦.
할멈의 하소연을 모두 다 들어보소 / 聽婦前致詞:
「아들 셋이 업성(?城)을 공격했다는데 / 「三男?城戍,
큰 아들놈 편지와 알려주기를 / 一男附書至,
둘째 놈 전쟁터에서 막 죽었습니다 / 二男新戰死,
산 놈은 근근이 목숨 유지야 하지만 / 存者且偸生,
죽은 놈은 이제 멀리 가버렸구료 / 死者長已矣.
집안에는 이제 정말 아무도 없고 / 室中更無人,
오로지 있는 것은 젖먹이 손자 / 唯有乳下孫.
손자놈 있어서 에미는 꼼짝 못해 / 有孫母未去,
출입을 하려도 온전한 치마 없다오 / 出入無完裙.
이 늙은 몸 비록 힘이 없다 하지만 / 老?力雖衰,
관리 따라 전선에 밤새 가겠소 / 請從吏夜歸.
지금이라도 급히 하양(河陽)으로 떠나면 / 急應河陽役,
그래도 아침 준비는 해줄 수 있지 않겠소」 / 猶得備晨炊.」
밤이 깊어 사람 소리 끊어졌건만 / 夜久語聲絶,
어디선가 목메어 흐느끼는 소리 / 如聞泣幽咽.
아침 밝아 길 나서며 했던 일은 / 天明登前途,
혼자 남은 할아범과 작별하였지 / 獨與老翁別.
위 작품은 작가가 어느날 저녁 석호(石壕)라는 마을의 농가에서 하룻밤을 묵을 때 일어났던 일을 묘사한 것이다. 그곳의 관리가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징집을 하고 있었다. 젊은이는 이미 모두 차출되었으므로 이젠 나이든 할아버지까지 징집하고 있는 것이다. 전쟁터에 나가서 살아 돌아오는 이가 얼마나 있으랴. 이미 아들 하나는 죽고 말았다. 아들 셋을 전쟁터에 내보냈던 할아범은 허겁지겁 담장 넘어 숨어버렸다. 그 대신 할멈이 나가 신세 타령을 하고 있는 것이다. 먹을 것도 마땅치 않으니 옷은 오죽하랴. 어린 손자의 에미--곧 며느리--가 멀쩡한 치마 한벌 없다는 것은 당시의 민생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지 않겠는가.
위 작품은 대화를 삽입하는 다소 특이한 형식으로 한대(漢代)의 악부시(樂府詩)에 흔히 보이는 생동적인 서사법(敍事法)을 활용하고 있다. 마지막 구절에서 작가는 혼자 남은 할아범과 작별을 나누었다는데서 결국 할멈이 끌려갔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노인네까지 차출하지 않을 수 없었던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기에 앞서 누구를 위하여 전쟁을 하는지 묻고 싶은 것이다.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누구를 위하여 전쟁을 하는가?
<석호리(石壕吏)>를 비롯하여 <신안리(新安吏)> 그리고 <동관리(潼關吏)>를 일컬어 보통 「삼리(三吏)」라 부르고 <신혼별(新婚別)> <수로별(垂老別)> <무가별(無家別)>을 일컬어 「삼별(三別)」이라 부른다. 안록산의 난(756-759) 초기에 함락되었던 수도 장안(長安)이 757년 겨울 수복되었지만 그 이듬해 또 다시 반란군에 의해 함락위기에 몰렸다. 급해진 관군(官軍)은 노소(老少)를 가리지 않고 차출하여 남자들을 전쟁터로 몰아냈다. 두보는 당시에 수도 장안에서 고향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는데 도중에 각종 아비규환을 목격했던 것이다. 직접 보고 들었던 비극을 일련의 시로 엮은 것이 바로 「삼리(三吏)」와 「삼별(三別)」이다. 연작시(連作詩)라고 하겠는데, 당시 상황을 역사 기록과도 같이 시로 엮어냈기 때문에 두보의 시를 읽으면 당시 역사를 실감나게 알 수 있다. 일반 역사 기록은 아무래도 형식적이어서 실감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두보의 시를 시사(詩史)라고 부른다. 중국인들은 역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민족이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시사(詩史)의 성격을 지닌 두보의 작품을 후세 작가나 비평가들은 매우 높게 평가했다.
<登高-높은 곳에 올라>
급한 바람 높은 하늘 원숭이 소리 애달프고 / 風急天高猿嘯哀,
깨끗한 물가 하얀 모래 뭇새는 오락가락 / 渚淸沙白鳥飛回.
낙엽은 끝없이 우수수 떨어지고 / 無邊落葉蕭蕭下,
장강은 하염없이 콸콸콸 흘러온다 / 不盡長江滾滾來.
이역 만리 가을날 쓸쓸한 나그네 되어 / 萬里悲秋常作客,
평생 병치레에 홀로 오른 누각이여 / 百年多病獨登台.
힘들고 어려운 시국 귀밑머리만 세는데 / 艱難苦恨繁霜?,
몸마저 좋지 않아 술마저 끊게 되었어라 / ?倒新停濁酒杯.
이 작품은 767년 작이다. 안록산의 난도 이미 평정되어 당나라는 소강 국면을 맞았지만 세월은 무상하게 흘러 두보의 나이도 이제 56세가 되었다. 임종을 2년 앞둔 시점인데다 그가 말년에 서남(西南) 지역을 유랑하다 객사했던 점을 상기하면 누추한 촌늙은이의 행색이었을 것이다. 작품 내용으로 보건대 일년 중 가을철이다. 중국인들은 9월 9일을 일컬어 ‘중양절(重陽節)’라 부르는데 《주역(周易)》에서는 9를 양(陽)으로 본다. 이 양(陽)이 둘 겹치게 되므로 양기(陽氣)가 가장 왕성해지는 날이다. 음기(陰氣)가 상승하고 극히 강한 양기(陽氣)가 내려 누르는 날, 이런 날 낮은 곳에 있게 되면 나쁜 기운을 받아 일년 내내 몸이 아프다고 믿었던 옛 사람들은 이날에는 꼭 높은 곳에 올라----이른바 <등고(登高)>--- 국화주(菊花酒)를 마시고 향초(香草)를 몸에 달았다.
높은 곳에 오르면 당연히 시야가 뜨이고 마음이 허허해진다. 특히 나그네의 경우는 홀로 등산을 하게 되므로 그 허허한 심정이야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으랴. 두보의 경우는 가족과 헤어지고 세파에 찌든 중늙은이인데다 잔병에 시달렸던 노구(老軀)였을 것이다. 이러한 정황을 머리에 그리며 위 시를 다시 읽어 보시라.
요컨대 두보(杜甫)의 시를 읽으며 느끼는 것은 그토록 일생을 통해 고통을 당하고 실의 속에서 헤맸지만 세상을 증오하거나 염세적인 냄새를 피우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점은 실로 어려운 일이다.
술을 이야기함에 있어 이태백(李太白)과 두보(杜甫)를 뺄 수는 없다. 이태백은 이백이라고도 하는데 당 나라의 대 시인으로 두보와 쌍벽을 이루는 유명한 시인이다. 두 사람은 이백이 44세, 두보가 33세 때 만났다. 이들의 만남을 '4000년 중국 역사상 이처럼 중대하고 이만큼 기념비적인 외합은 없었다. 그것은 청천에서 태양과 달이 충돌한 것과 같다.'라고 표현하는 학자가 있다.
이 두 대시인이 모두 술을 좋아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62세에 파란 많은 귀양살이를 마친 시성 이백은 일설에 의하면 장강 위에 배를 띄워 노는 중 크게 취하여 강물 위에 비친 달을 잡으려다 익사했다고 전해진다. 두보 역시 한 많고 어려운 객지 생활을 하면서 술을 마셨다. 그의 시 <등고(登高)>에는 그러한 고달픈 심정을 노래하고 있다.(앞 참조)
이 두 사람이 만나고 헤어짐의 감회가 오죽했겠으며 술잔도 많이 오갔겠는가. 그러한 감회가 담긴 이백의 시 <석산에서 두보를 보냄>이 있다.
[헤어지기 아쉬워 취한 지 며칠이나 되었을까
어찌 말할 수 있으랴
또다시 술통을 열게 될 것이다
멀리 떠날 신세인 우리
숲 속에서 술이나 다 비우세]
두보는 그런 선배를 잊을 수 없어 <봄날 이백을 생각하며>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언제쯤이면 당신과 술을 나누며
다시 한번 자세하게 시를 말할 건가]
이상의 내용은 이인호 교수의 홈에 있는 내용을 바탕으로 일부 첨삭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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