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일화(ㅂ-ㅇ)

안정복(1712-1791, 경기도 광주)

톰소여와허크 2010. 10. 6. 13:45

안정복(1712-1791, 경기도 광주)


  아래는 조정진의 글입니다.

[ 2006년 국민대 박물관장인 국사학과 박종기(55) 교수는 20여년 전 한 제자가 우연히 헌책방에서 3000원에 산 고서 ‘고려사’를 뒤지고 있었다. 오래돼 표지가 너덜너덜한 책에는 누군가 주를 달며 연구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박 교수는 이 책이 훗날 단재 신채호로부터 ‘평생을 오직 역사학 연구에 전념한 500년 이래 유일한 사학 전문가’라는 극찬을 받는 안정복의 손때가 묻은 수택본(手澤本)임을 알게 된다. 수택본은 말 그대로 책 주인의 입김과 손자국이 오롯이 담겨 있는 책을 뜻한다.

  책 초입부 오른쪽 아랫부분에 책 주인 안정복의 사각 도장이 찍혀 있다. 빨간 인주가 선명하다. 내친 김에 예의 메모 부분을 모두 번역해 ‘동사강목’과 대조작업에 들어간 박 교수는 안정복이 적어놓은 글들이 실제로 ‘동사강목’의 고려왕조사 서술에 그대로 반영돼 있음을 발견했다. 이를테면, 인물 ‘이제현’(1287∼1367)에 대해 “젊은 시절부터 빼어났으며, 글을 잘 짓는 기질이 있었다. 오랫동안 원나라에서 충선왕을 모셨으며, 당시 중원의 문사들과 함께 학문을 갈고 닦아, 조예가 더욱 깊었다”고 주를 붙였다.

  안정복은 ‘고려사’에 기록되지 않은 개별 인물의 자호(字號)나 시호(諡號)를 묘지명이나 금석문, 족보 등에서 찾아내 ‘고려사’ 수택본에 정리했다가 ‘동사강목’에서 해당 인물을 서술할 때 반영했다.

  박 교수는 자신이 보관하고 있는 안정복 수택본이 한적본(漢籍本) ‘고려사’ 50책 가운데 42책이라는 것도 알아냈다. 그는 안정복 직계 후손 종가를 방문하는 등 나머지 수택본을 찾아 전국을 뒤진 끝에 서울대 규장각에 42책만 빠진 채 49책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 BK21 사업의 일환으로 전개된 고서 전산화 작업 덕분이다.

  박 교수는 안정복이 남긴 기록 부분을 살핌으로써 그가 어떤 사관과 자세로 ‘동사강목’을 편찬했는지, 특히 고려왕조의 역사에서 어느 부분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자료를 정리했는지 알 수 있었다고 밝혔다. 가령, 고려사에서 군주의 역사를 주로 기록한 ‘세가’와 신하의 역사를 기록한 ‘열전’ 부분은 모두 안정복이 공부한 내용이 기록돼 있다. 고려를 세운 왕건에 대해 태조로 인정하지 않고 ‘궁예나 견훤과 같은 도적의 무리’로 표현하는 등 그의 철두철미한 성리학적 사고방식이 배어 있다.  

  안정복과의 만남을 계기로 고려사만 파다 조선조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는 저자는 오늘날 우리 역사학에는 사실과 고증을 무시하는 일방통행식의 이념이 횡행한다고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의 주장은 쉽게 풀어 쓴 역사 에세이 ‘안정복, 고려사를 공부하다’에 담겼다.]


아래는 이선희의 글을 줄인 것입니다.

[ 이익은 “전토(田土)가 있은 후에 조세(租稅)가 있는 것인데, 조세를 감하면 전토를 가진 자만이 혜택을 입게 된다”고 하여 조세 감면이 백성을 위한 정사가 아니라고 지적했다. 이익이 보기에 백성 중 전토를 가진 자는 1할이나 2할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위에서는 넓은 혜택을 베풀어줘도 아래에서는 굶주리는 고통을 모면할 길이 없으니, 무슨 이익이 되겠는가? 전토가 있으면 부자이다. 저 부자들이야 조세를 감해주지 않더라도 아무 해로움이 없다. 전토를 위해 산에 불을 질러 개간하고 물을 막아 농토를 키워 개인의 이익에만 급급한 자들이 오히려 조세의 반감(半減)을 은근히 매일 바라고 있다. 또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은 그 소원을 들어주는 데 힘써, 단지 국고에 손실만을 초래하고 있으니, 장차 어이할 것인가?” 세월이 지나 현재를 살면서도 조선 후기 학자의 한탄이 새롭기만 하다.

  안정복은 이익을 스승으로 모셨다. 이익은 안정복의 성실한 학문 태도와 겸손함을 높이 평가했다. 안정복은 “사람이 정치를 하는 것이 배우지 않고 가능하겠는가”라고 자문하며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이 둘이 아님을 강조했다. 안정복의 선정(善政)은 충청도 목천현을 맡으면서 빛을 발했다.

  안정복이 목천에 부임한 뒤 백성의 어려움을 살펴보기 위해 수령을 보좌하는 기구인 향청(鄕廳)에 글을 내렸다. “백성을 사랑하는 성상의 지극한 뜻에 부응하고 단지 백성을 수탈해서 자신만 살찌우는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라고 수령의 엄한 정명을 세운 뒤 고을의 폐단이 무엇인지 자세히 보고하게 했다. 안정복이 새로 부임한 뒤 여러 통로를 통해 고을 형편을 살펴보니 크게 두 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하나는 겨울에 얼음을 잘라 빙고(氷庫)에 보관하는 빙정(氷政)에 백성의 고단함이 큰 것이었다. 또 하나는 관청의 재정이 좋지 못해 수령이 바뀌는 등 고을에 큰일이 생길 때마다 백성을 수고롭게 하는 일이었다.

  안정복은 빙정을 행하면서 한 가지 의혹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4개 면의 백성 수가 1천 명이 넘는 상황에서 힘든 빙역을 피하려는 사람도 많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면을 담당하는 면임(面任)이나 해당 아전이 받는 뇌물이 많을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안정복은 앞서 시행한 빙정에서 필요한 인원수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었기에 1개 면이 1년씩 맡도록 새롭게 법식을 세웠다. 이후로 각 면은 8년에 한 번씩만 빙역이 돌아왔기 때문에 백성의 편리함이 컸고 면임이나 아전에게 뇌물을 바쳐야 하는 일도 크게 줄어들었다.

  그런데 안정복이 실시한 위와 같은 방법은 이미 그보다 앞선 시기에 인천부사가 시행한 것이었다. 안정복은 인천부사의 일생을 정리한 행장(行狀)을 읽고 익혀서 그가 얼음 뜨는 일을 면제해주고 10년에 한 번씩만 돌아오게 한 선정을 알고 있었다. 여러 사례를 수집해 익히 알고 있었기에 해결해야 할 문제와 맞닥뜨렸을 때 안정복은 적절한 시책을 시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정치하는 데도 배움이 필요하다”는 명제는 단순한 지식의 습득이 아닌, 백성을 위한 정책과 방법의 활용이라는 좀더 깊고 영향이 큰 결과를 품는 구절이었던 셈이다.

   안정복이 목천현의 수령직을 다하고 집에서 지내던 중 하루는 친척이 그를 찾아왔다. 안정복이 떠난 뒤 목천현 내에 있는 복귀정(伏龜亭)에 ‘떠난 목민관을 그린다’는 뜻의 거사비(去思碑)가 세워졌다는 소식을 친척이 전했다.

  목천에 있을 때 안정복은 손님을 맞아 함께 식사를 할 때면 항상 너무 적게 먹는다는 소리를 들었다. 본래 안정복은 적게 먹는 편이었지만, 우스갯소리로 “잘 다스리지도 못하면서 먹고 마시기만 하면 마음이 편할 것인가. 그래서 적게 먹는다네”라고 했다. 그때를 떠올리며 자신을 기리는 백성의 마음을 고맙게, 그리고 머쓱한 부끄러움으로 담아 안정복은 시를 지었다.


삼 년간이나 목천의 밥으로 배를 채우지 못하면서도(三年不飽木州飯)

재주 없이 먹기만 한다고 부끄럽게 여겼었는데(自分無才愧素餐)

우습게도 복귀정에 세워진 한 조각 돌(可笑龜亭一片石)

거기에다 내 이름 남겨 후인들에게 보이다니(陋名留與後人看)]


 아래는 신병주의 글을 줄인 것입니다.

[ 안정복의 호는 순암(順庵),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원래 그의 가계는 광주 안씨 중에서도 문장이 뛰어나고 벼슬이 높아 손꼽히는 명문가로 일컬어져 왔다. 그러나 안정복이 살았던 시대는 노론이 정치권력을 독점하면서 남인이었던 그의 집안은 점차 가세(家勢)가 기울었다. 조부가 울산부사로 재직 중 노론의 배척을 받아 파직을 당한 후 부친은 일평생 처사로 일관했으며, 안정복도 15세의 어린 나이에 조부의 비운을 목격한 후 38세 때까지 과거는 물론 일체의 출사도 하지 않았다.

  1726년(영조 2)부터 무주(茂朱)에 은거하던 안정복 집안은 1735년 조부 사망 후 고향인 경기도 광주 덕곡리로 돌아왔다. 안정복이 광주에 정착하게 된 것은 그의 인생과 학문에 큰 전환점이었다. 서울 가까이에서 새로운 학문과 서적을 손쉽게 접할 수 있었으며, 가까운 안산 첨성촌에 실학의 대종(大宗)인 성호 이익(1681~1763)이 살고 있었던 까닭으로 그의 제자가 되어 성호 실학의 중요한 계승자가 되는 직접적인 계기가 마련되었다.

  안정복은 어릴 적부터 성리학의 경사(經史), 시문, 예학 이외에 음양, 천문, 복서(卜筮), 병서, 패관소설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학문을 섭렵하였다. 그리하여 ‘책이 생긴 이래 문헌상 고증할 만한 것들은 보지 않는 것이 없다’고 자부할 만큼 해박하였다.

  안정복은 35세라는 늦은 나이에 이익에게 나아가 제자가 되기를 정식으로 청하였다. 이때 이익은 65세의 노학자로서 경세치용(經世致用)의 학문을 창도하여 남인 실학파의 중심인물이 되어 있었고 첨성촌에서 여러 제자들을 키우고 있었다. 안정복이 이익의 문하에 들어갔을 때 윤동규(역사, 지리), 신후담(병학, 산학), 이병휴(경학), 권철신(서학) 등 쟁쟁한 학자들이 각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안정복은 이들과의 경쟁 속에서 학문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고, 성호학파의 정통을 수립하기 위해 끊임없이 학문에 정진하였다.

  안정복의 저술 중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 『동사강목(東史綱目)』은 이러한 열정의 산물이었다. 『동사강목』은 안정복이 45세 되던 해인 1756년 집필에 착수하여 3년간의 몰두 끝에 일단 초고를 완성하였고, 20여년 뒤 목천현감으로 있을 때 다시 이 초고에 손질을 가하여 최종적인 작업을 끝내게 된다. 조선후기 개인에 의해 쓰여진 기념비적인 역사서가 완성된 것이다.

  『동사강목』은 상고시대부터 고려말까지를 다룬 역사서로,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는 기존의 역사인식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하였다. 안정복은 서문에서 ‘대개 사학의 방법은 정통을 밝히고 시비를 바로잡아 충절을 칭찬하는 것과 제도와 문물을 상세히 하는 것’이라 하여 기존 역사서의 오류를 지적한 후, 계통(系統)을 바르게 밝히고 사실 고증에 충실한 역사서를 저술하고자 하였다.

  『동사강목』은 단군에서 시작하여 기자, 마한, 통일신라, 고려를 정통으로 취급하고 삼국시대를 무통(無統)의 시대로 한국사 체계를 구성하였다. 이처럼 안정복이 정통론에 충실했던 것은 우리 역사에도 정통이 있음을 강조하여 중국 중심주의적인 역사관에 대응하여 우리 역사에도 독자성이 있음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깊이 배어 있었다. 또한 사실고증을 철저히 하여 보다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방향으로 우리 역사를 서술하려고 한 흔적들이 『동사강목』 곳곳에 나타나 있다. 그가 역사전문가로 불릴 수 있는 까닭이기도 하다.

  안정복은 단군에서 고려 말에 이르기까지 여러 사실들을 새 자료에 의해 보완하고 나아가 이설(異說)들을 새롭게 고증하고, 보충 설명이 필요한 부분에는 주를 달아 기록하여 자신의 견해를 나타냈다. 『동사강목』의 저술에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과 같은 기본적인 서적은 물론이고 개인의 문집, 비문 등을 광범위하게 활용하였으며, 중국서적들도 상당수 참고하였다.

  안정복은 『동사강목』 이외에도 정치, 경세, 사회에 대해 탁월한 견해를 밝힌 『만물유취(萬物類聚)』,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여러 가지 잡다한 사항을 모아 정리한 백과사전적인 저술 『잡동산이(雜同散異) 53책, 그리고 정무(政務)의 긴요한 사항에 대해 목민관(牧民官)의 임무와 개혁정책을 제시한 『임관정요(臨官政要)』 등 다양한 저술을 편찬하였다. 이중 『임관정요』는 후배 실학자 정약용의 『목민심서』의 편찬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동사강목』을 비롯한 안정복의 저술들은 18세기를 풍미했던 ‘실학’의 시대사상을 반영해 주는 한편, 조선후기의 최고 역사전문가 안정복의 이름을 널리 기억하게 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