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일화(ㅂ-ㅇ)

이형기(1933-2005, 경남 사천)

톰소여와허크 2010. 8. 30. 19:30

이형기(1933-2005, 경남 사천)

 

아래는 이유경 시인의 글이다.

[ 이형기 시인이 쓰러진 것은 1994년 7월4일이었다. 동국대에서 시론을 강의하고 있던 그는 매일 아침 하던 산책길에서 가벼운 뇌졸중 증세를 겪었다. 평소 혈압이 정상적이어서 갑작스럽게 겪는 현기증과 구토에 「설마」 했다. 아무 대책도 생각나지 않아 절뚝거리며 보통 때보다 훨씬 늦게 집에 도착한 그는 『한숨 푹 자고 나면 괜찮아질 거야』 하며 방으로 들어가 누워 있었다. 이것이 탈이 된 것이다.


그날부터 8년 동안 이 부부는 병마와의 기나긴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당뇨와 뇌졸중에 겹쳐 느닷없이 닥친 결핵. 이 3중고 속에서 그의 몸은 피폐의 기나긴 터널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지난 설을 전후해서 나는 서울 도봉구 방학4동 우성2차 아파트 102동 510호의 그의 집을 두 번 방문해 인터뷰를 하고 왔다. 처음엔 혼자서, 두 번째는 그의 오랜 친구인 조영서 시인과 함께 갔다. 그를 만나고 올 때마다 마음이 울적했다. 사람 사는 게 별 거야 있을까마는 오랜 기자 생활 끝에 한 신문사의 편집국장에서 상무까지 지냈고, 대학교수로 10년 넘게 종사해 온, 그리고 50년 동안 시만 쓰며 시집 여덟 권과 비평서 세 권 등 저서 20권을 가진 탁월한 한 시인의 만년의 모습이 그의 첫 시집 제목처럼 「적막강산」 같아서 그랬다.


사는 형편에 대해선 남 보기 부끄러우니 제발 쓰지 말아달라고, 그의 부인 조은숙씨가 신신당부를 했지만 나는 써야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병마와 싸우는 불우한 문인에게 문예진흥원이 지급하는 월 60만원 정도의 생활비로, 치료비다 약값이다 집 관리비에 나눠 쓰며 겨우 겨우 사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나로선 울화와 쓰라림밖에 달랠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소학교 시절 그러니까 지금의 초등학교 때 작문시간에 쓴 글의 첫줄이 지금도 기억나는데 뭐냐하면 「가을은 벌레소리로부터 온다」란 것이었어요. 당시엔 일본어로 쓴 것이긴 하지만, 어려서부터 글재주는 있었나봐요. 학교공부만 하라는 아버지와 그것을 맹종한 어머니 몰래, 나는 일본어로 된 이야기책만 읽고 있었던 것이지요. 처음엔 장차 소설가가 되기로 했지요.


그러다 보니 할 것이 너무 많아졌지요. 유행가 가수가 되고 싶었고, 서커스단의 그네뛰기가 근사하게 보여 그것도 되고 싶었어요. 운동선수, 그 중에서도 역도선수가 되고 싶어 돌 역기를 열심히 들어올렸고, 기왕이면 발명가가 되고 싶어 몇 가지의 화공약품을 구하러 다닌 적도 있었어요. 그러니까 근사하게 보이는 것은 다 하고 싶었던 것인데 줏대 없이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그만 시라는 덫에 걸려든 것이지요. 시인이 된 것도 다 내 팔자소관인 것 같아요. 팔자소관이란 것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되는 것이니 말이오.


…만으로 열여섯 살에 나는 시인이라는 덫에 사로잡혔지요. 시인들 얼굴 구경하러 갔다가 백일장에 참가해 시를 써 낸 것이 장원을 했고, 헛일 삼아 보내 본 문예지의 작품모집에 추천이 된 것이 그 나이 때였으니 너무 쉽게 그리고 빨리 시의 덫에 걸린 셈이지요. 그 시의 덫이라는 게 참 묘해서, 한번 걸려드니까 사람을 그야말로 하늘의 별이라도 딴 듯한 기쁨을 주더군요. 그때까지의 내 모든 기웃거림은 일순에 무가치한 것이 되고, 그때부터는 오직 시 하나에만 몰두하게 하더란 말입니다. 그렇게 일찍 서둘러서 시인이 되는 것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그로부터 나는 평생 시만 생각해온 것 같아요. 신문사 통신사 등에서 정치부기자생활도 오래 했고, 일찍부터 정계 진출의 유혹도 많았지만, 언제나 그런 대열에서 먼저 발을 빼곤 했습니다. 지금 와서 보면 정계 같은 데 발 들여놓지 않았던 게 만 번 다행이었고…. 관훈클럽 창립에도 깊이 관여를 했지만 정작 사람들이 모이고 했을 때 나는 빠져버렸어요. 늘 「이게 아닌데, 이러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속으로는 시를 생각하고 여타의 것은 관심에서 애써 지우려 했으니까』


1949년 11월1일 진주 촉석루 주변에선 제1회 영남예술제(1959년부터 개천예술제로 이름을 바꿨다)가 열리고 있었다. 한국 최초로 열린 이 예술제의 최고 관심사는 한글백일장이었다. 시제는 「만추」였고, 시조를 쓰는 사람에겐 「남강」이 제목이었다. 백일장은 학생부니 일반부니 하는 구분이 없는 오픈 형식이었고, 참가자는 한 시간 안에 시를 완성해 제출해야 했다. 유치환 김상옥 구상 김수돈 설창수 이경순 등 기라성 같은 시인들이 심사위원으로 단상에 앉아 있었다.


두어 시간 후 발표된 심사결과는 진주농림학교 학생인 이형기가 장원, 삼천포중학생인 박재삼이 시조를 써 차상을 했다. 시상식에선 이형기와 박재삼이 나란히 서있었다.


「쓰러지고 싶은 하늘이어라/한아름 가득 안고/쓰러지고 싶은 하늘이어라」는 도입부밖에는 기억나지 않는다는 20여 행의 그의 장원 시는 「일기가성(一氣呵成: 단숨에 지어냄)」으로 쓴 것이라고 했다.


『행운이란 것이 연쇄작용을 일으키는가 봅디다. 백일장에서 장원을 하고 최계락이란 당시 걸출한 시 쓰는 친구 하나와 훗날 서울에선 둘도 없는 친구가 되는 박재삼을 만나게 된 것이 그랬어요. 백일장 장원이 된 한 달 후엔 당시의 유일한 문학잡지인 「문예」에 1회 추천까지 받게 되었으니까요. 물론 「문예」의 것은 백일장 전에 투고한 것이지만. 또 투고할 땐 추천된다고는 생각지도 않았어요.


…최계락과 나는 이듬해 「二人」이란 동인지를 냈는데 창간호가 폐간호가 된 셈이지만, 거기 실린 최계락의 시들은 주옥같은 것들이었어요.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그의 대표작이 망라된 느낌입니다. 1970년 7월4일 갓 마흔에 아깝게 간 그와 나는 같은 국제신문사의 기자로 있었습니다. 그는 부산 본사에서, 나는 서울지사에 근무하고 있으면서도 「최계락 하면 이형기, 이형기 하면 최계락」 하는 식으로 21년 동안 단짝 친구로 지났어요』


최계락 시인이 肝(간) 경화로 세상을 뜨자 밤을 새워 부산으로 달려 내려온 이형기 시인은 「곡 최계락」이란 시의 마지막 구절 「너를 데려간 명부의 사자처럼/눈먼 사내./캄캄하다. 도와다오. 친구여/서울의 시인들이 부산 최계락의 소식을 물으면 어쩔거나/그 한 마디만이라도 가르쳐다오」를 읽으며 오열을 삼켰다.


동갑내기인 박재삼과는 영남예술제에서 장원과 차상으로 시상식에서 나란히 섰지만 이형기는 그때 키가 컸고, 박재삼은 키가 작아 장원을 해 기분이 좋아진 이형기에게는 「꼬마 삼천포 중학생」 정도로 인상에 남았다. 그 박재삼이 「문예」에서 1회 추천을 받고 1955년에 창간된 「현대문학」을 통해 추천완료가 되자 둘은 친구가 되었다.


박재삼이 현대문학사에 이어 대한일보 기자로 있었을 때, 이형기가 이곳저곳 신문기자로 옮겨다니다 같은 신문사에서 만나는 등 둘의 교류는 남달랐다. 그러나 이형기 시인이 아포리즘 적인 분방한 시를 썼다면 박재삼 시인의 시는 전통적인 가락에 바탕을 둔 것이어서 이들 연배의 시들 사이엔 늘 쌍벽처럼 비교되었다.


박재삼 시인이 1997년 병고 끝에 세상을 뜨자 그때 3년여를 병마와 싸우고 있던 李시인은 이런 시를 썼다.


「너와 나는 많이 다르게 살았다./너는 처음부터/전통의 결 고운 슬픔을 가다듬어/비단을 짰지만/나는 비틀비틀 갈지자걸음/마냥 어지럽고 위태위태하다/그러나 다르면 얼마나 다를까 보냐고/이심전심 대수롭지 않게 지나다가/갑자기 네가 먼저 훌쩍 이승을 떠났고나/순서도 뭣도 깡그리 무시하고/그렇게 함부로/멋대로 가기냐 해봐도 소용없는 곳으로/…」


「오늘/이 나라에 가을이 오나 보다.//노을도 갈앉은/저녁 하늘에/눈 먼 우화는 끝났다더라.//한 색 보라로 칠을 하고/길 아닌 千里를/더듬어 가면…//푸른 꿈도 한나절 비를 맞으며/꽃잎 지거라./꽃잎 지거라.//산너머 산너머서 네가 오듯/오늘/이 나라에 가을이 오나보다.」


그의 나이 열 여섯에 당시 유일한 문예지인 「문예」 1949년 12월호에 미당 서정주에 의해 첫 회 추천되었던 작품 「비오는 날」의 전문이다.


이듬해 6월호까지 추천을 마쳤는데 이형기 시인은 훗날 열일곱 살에 시인이 된 것을 많이 후회한다. 공부는 하지 않고 건방만 부리던 시골 중학생의 씨도 안 먹은 「시인 병(病)」을, 선배 시인들이 있어서 그때 극구 말려 주었어야 했다는 것이다.


『가끔 나에게 17세 중학생의 시壇(시단) 데뷔는 한국 최연소의 기록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솔직히 말해 등에서 식은 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곤 해요. 중요한 것은 시인이란 이름을 얻는 시기가 아니라 그 이름에 합당한 역량을 갖추는 일이니 말이지요. 그러자면 아무래도 시간이 걸리는 겁니다. 책도 읽을 만큼 읽어야 하고, 생각도 할 만큼 한 다음이라야 문학의 기초가 잡히는 것인데 나는 그런 과정을 건너 뛴 것 같으니 말입니다』


그가 태어난 곳은 진주로 되어 있지만 실은 경남 사천군 곤양면이다. 그가 세 살 때 아버지가 진주로 옮겨오면서 아예 본적을 진주로 해버렸는데, 그래서 그는 모든 이력서에 출생지를 진주로 해놓고 있다. 시골에서 소학교를 나온 그의 아버지는 언제 어떻게 배웠는지 트럭 운전을 하고 있었다. 희귀한 직업인 운전사로 돈벌이가 잘 된 아버지는 이형기가 소학교 저학년일 때 그의 할아버지와 삼촌들을 불러 진주에서 함께 살게 되었다. 그는 중학 6년 동안 줄곧 진주에서 살았다.


이 일대의 명문학교인 진주농림학교에 들어간 것은 졸업하면 군청서기가 보장돼 있다는 아버지의 주문 때문이었다. 광복되기 직전인 1945년 봄이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수업은 뒷전이고 매일처럼 비행장건설에 동원되었다. 그리고 광복이 되었다.


그러나 공사장에만 나돌던 교실은 광복이 되었다고 해서 수업 분위기로 쉽게 돌아서지 않았다. 좌우 사상투쟁이 격렬하게 번져 교실까지 몸살을 앓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중에 그에게는 또다른 근심거리가 생겼는데 그것은 그의 아버지가 심한 기침을 하면서 병석에 드러눕는 일이 잦아진 것이었다. 결핵이었다. 당시 결핵은 사망선고에 다름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는 2년 동안의 투병 끝에 세상을 떴다. 그가 중학 3학년 때였다. 어머니에게 남겨진 것은 그 동안의 병구완의 피로와, 살고 있는 집 한 채와 이형기를 맏이로 한 2남 2녀의 어린 자식들뿐이었다.


『아버지를 여읜 슬픔과 가난에 찌든 집안은 나를 책 속으로 끌고 갔던 것 같아요. 공부하는 책이 아니라 공부에 방해가 되는 문학 책들이었지요. 당시엔 시인 지망생의 교과서 같은 것이 「청록집」이었는데 나는 이 책을 외우다시피 했지요.


상급학년에 들어서는 20세기 초 러시아의 철학자로 혁명 때 프랑스에 망명한 셰스토프의 選集(선집)을 구해 열심히 읽었지요. 셰스토프는 젊은 시절의 나에게는 우상이나 다름없었는데 그의 매력은 문장이 아름답다는 것과 그 사상의 특이함 때문인 것 같아요. 셰스토프에 대해서 알거나 관심을 가졌던 사람을 나는 그 이후에도 만나지 못했으니까, 그를 읽은 것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진 셈이지요.


그리고 오스카 와일드의 「예술론」에 심취해 읽었는데 나중엔 이 책의 많은 부분을 나의 글에 인용하곤 했지요. 와일드를 알게 된 것은 소설가 이병주 선생 때문이었어요. 선생님은 당시 진주농림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는데 연극지도교사이기도 했지요. 1949년 가을이라고 생각되는데 학교에서 開校(개교)기념 행사로 오스카 와일드의 「살로메」를 공연한다는 게시가 붙어 있더군요.


나는 용기를 내어 선생님을 찾아갔습니다. 이 긴박한 시대에 어쩌자고 오스카 와일드 같은 퇴폐적인 작가의 작품을 무대에 올리느냐고 항의를 했던 거지요. 와일드가 퇴폐적이라는 이야기만 듣고 선생에게 항의를 했으니 한 마디로 망발이었지요. 李선생께서 담담하게 대답하더군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이 있지. 좁은 문으로 들어가면 처음엔 고생이 되겠지만 차차 길이 넓어져 나중엔 큰길로 나오는 것이야. 반대로 넓은 길로 들어가면 처음엔 쉽지만 차차 길이 좁아지니 더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이 되는 거란 말이야. 와일드는 그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넓은 길을 택한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네. 자네도 와일드를 다시 읽어보게. 감명이 있을 게야」


그 깨우침으로 나는 오스카 와일드를 찾아 진주 시내를 샅샅이 뒤지고 다닌 적이 있어요. 물론 일본어로 된 책들이지만…』


「문예」에서의 그의 첫 추천작 「비오는 날」을 주목한 사람은 이 잡지의 주간이며 당대 최고의 문학평론가인 조연현 선생이었다. 그는 1950년 신년호에 게재한 지난해 문학총평 말미에다 「첫 회를 추천받은 이형기란 젊은이가 촉망된다」고 쓴 것이다. 大 평론가 조연현 선생이 자신의 이름만 기억해 줘도 감지덕지할 무렵에 첫 추천작 한 편으로 촉망받는 신인 운운해 주었으니 그로선 상상을 절하는 기쁨이었다.


조선생 나름으로는 시가 좋아 격려를 해주고 싶어 쓴 것이겠지만, 아직은 10代 후반의 소년 티가 여전한 이형기에겐 격려 이상의 것일 수밖에 없었다. 안하무인적 도취로 실수도 많이 저질렀다고 훗날 스스로를 나무랐다.


그해 4월에 두 번째 작품을 미당이, 6월 호엔 이 잡지의 발행인인 모윤숙 시인이 마지막 추천을 해주었는데 추천완료 소감을 쓴 것은 5개월 후인 늦가을이었다.


까까머리의 철없는 중학생 복장의 이형기는 진주에서 기차를 타고, 전쟁으로 폐허가 다된 서울로 올라가 조선생 댁에 불청객 식객으로 머물면서였다.


스스로 생각해도 소름이 돋는 그때의 치기에 대해 그는 「아아 석제선생」이란 글에서 이렇게 회고하고 있는 것이다. 석제는 조선생의 아호다.


<…3회 추천을 마친 터라 제딴엔 천하가 다 알아 주는 시인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터무니없는 착각 속에서 이제 나는 종군문인이 되어 평양 땅을 밟아보리라 하고 몇 푼의 여비를 마련해서는 난생 처음으로 서울행 기차를 탄 것이다. …서울에 도착한 나는 여관도 정하기 전에 지금의 국민은행 본점 자리 부근이 아닌가 싶은 「문예」사로 선생을 찾아갔다. …초라한 행색으로 예고 없이 나타난 시골의 까까머리 중학생 불청객을, 그러나 선생은 반갑게 맞이해서 다방으로 데려가 차를 사주었다.


차를 마시면서 나는 선생에게 상경의 목적을 아뢰었다. 종군문인이 되어 평양에 올라가 보고 싶다는 그 말에 선생은 그저 웃기만 하더니 서울에는 친척집이 있느냐고 물었다. 『없습니다. 여관을 잡을까 합니다』/『그럼 여기서 좀 기다리고 있게 잠깐 사무실에 다녀올 테니』…식사를 마친 다음 선생은 나에게 다시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그래서 덮어놓고 따라간 곳이 그 무렵 연건동에 있던 선생의 댁이다.


그날 밤 선생은 동란 때문에 발행이 중단되었던 「문예」가 곧 속간된다는 소식을 알리면서 그 속간호에 낼 추천완료 소감을 쓰라고 했다. 그러면서 선생은 원고지 한 권과 담배 한 갑을 내 앞으로 밀어놓고 자기는 누워서 책을 펴들었다. 그때까지 나는 담배를 피우지 못했다. 그러나 피우지 못한다면 선생이 아직 어리구나 할 것만 같아서 정말 버릇없이 연기를 뻐끔대며 선생 곁에 엎드려 글을 썼다. 1․4 후퇴로 이듬해 정월 피란지 부산에서 발매된 「문예」 전시 호 소재의 내 천료소감이 그때 쓴 글이다.


이리하여 하룻밤을 선생 댁에서 신세를 진 나는 이튿날도 갈 곳이 없어 선생의 주변을 맴돌게 되었다. 그리고 선생은 그러한 나를 마치 당연한 일인 것처럼 또 댁으로 데리고 갔다. 사흘째도 그랬고 나흘째도 그랬다. …나의 뻔뻔스러운 식객노릇은 아마 일주일 이상 계속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 번도 선생은 언짢은 기색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나라는 식객 때문에 밤마다 아이들을 데리고 할머니 방으로 건너가야 했던 사모님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9․28 수복 후의 서울은 유엔군과 국군이 38선을 넘어 북진 중에 있었으므로 군인들과 돌아온 피란민 등으로 난장판이었다. 게다가 당시 趙선생은 인민군 치하에서 석 달 동안 숨어서 지낸 끝이라 사는 형편은 말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부부가 전혀 내색을 않고 최선을 다해 이 철부지의 無錢(무전) 기식을 도와 주었던 것이니, 趙演鉉 선생의 자상한 인품이 잘 드러나는 부문이다.


그로부터 10년 후 조연현 선생의 인척인 조은숙씨가 이형기 시인의 부인이 되었던 것은 이때의 인연이 크게 작용했던 것이다. 趙선생이 키가 크고 미남인데다 시인으로 신문기자로 대성할 것 같은 이형기에게 당신의 가까운 인척 규수를 맡긴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조처였다.


이 두 분 사이 동란 시절의 한 풍경은 프랑스의 상징주의 시인 폴 베를렌이 열여섯 살의 소년 시인 랭보의 천재성을 발견하고 나이를 초월한 우정을 쏟으며 함께 지낸 것이 잠시 연상되는 대목이다.

진주농림학교를 나온 그는 당시 부산으로 피난와 있던 동국대학의 불교학과를 선택해 입학한다. 1951년이었다. 피란학교인데다 모든 젊은이들이 軍에 강제 징집되던 시절이라 학과 학생은 대여섯 명에 불과했다. 그는 『처음엔 신학교로 가려다가 어차피 苦學(고학)할 신세, 자신이 없어 이쪽을 택했다』고 했다.


나라 전체가 전쟁으로 시달리던 시대에 편모슬하의 그로선 대학생이란 신분증을 갖는 것은 당장 징집을 피할 수 있는 편법이었다. 그러나 편모슬하의 고학생이었던 그는 등록금을 못 내 한 학기를 낙제하고 4년 반 동안에 출석한 날짜란 것이 100일 미만이었다. 지금이야 말도 안 되는 노릇이지만 당시의 대학은 출석을 거의 하지 않아도 등록만 하고 기말시험만 치르면 학생증이 유지되었던 것이다.


그가 糊口之策(호구지책)으로 한 아르바이트는 주로 출판사의 편집과 교정 보는 일이었다. 그러나 급료가 너무 형편없어 자주 옮겨 다녀야 했다. 다닌 출판사 중에는 당시 큰 회사로, 「신역 삼국지」 全15권을 내 화제를 일으켰던 「평범사」도 있다.


그때의 출판사 직원이란 책을 만드는 일도 중요하지만 더 많은 시간을 책 파는 일에 매달려 있어야 했다. 평범사의 직원 이형기가 이 무렵 대구에서 조지훈 시인을 만난 것도 수금을 위해 출장을 갔을 때였다. 대구로 피란 온 문인들이 주로 술타령을 하는 술집을 묻고 또 물어 찾아갔는데, 거기 지훈이 나와 있었던 것이다.


곁에 다가가 인사를 하고 여러 이야기 끝에 이형기가 물었다.


『선생님 어떻게 하면 시를 잘 쓰겠습니까?』


지훈의 대답은 간단하고 명료했다.


『방치하는 것뿐이야』


시가 될 수 있는 일체를 있는 그대로 「방치하라」는 말은 감수성 좋은 젊은 시인 이형기에게 대단한 암시를 주었다.


휴전이 성립되고 피난을 갔던 학교도 직장도 모두 서울로 돌아오자 이형기도 서울에 올라오게 되었고, 그는 국제신문 서울 주재 기자가 되어 있었다. 그가 한 일은 서울 문인들의 원고를 청탁하고 받아 부산의 본사로 보내는 일이었다. 문화관계 기사도 많이 썼다.


한때 연합신문에 있던 그는 신문사가 넘어가자 같은 계열의 동양통신으로 옮겼고, 서울신문과 경향신문에서 동시에 스카우트전이 벌어져 경향신문을 택했는데 첫 출근 날이 폐간 날이었다. 하는 수 없어 그는 서울신문으로 가서 주저앉았다. 당시엔 이력서 같은 것도 없이 입사했고 그러면서 봉급도 탔다. 기자에겐 자신이 쓰는 기사가 곧 경력이며 이력서였던 셈이다. 그러나 4․19 직후의 서울신문은 경영이 엉망이었다. 자유당 시절의 어용지란 악명 때문에 정권이 바뀌고 민주화의 바람이 불자 서울신문은 「무주공산」 신세로 급전직하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노조가 생겼는데 이형기 기자는 노조위원장으로 피선되었다. 노조위원장이란 말뿐이었다. 사용자 측이 정부가 되어야 했는데, 내각제로 탄생한 민주당 정부는 밤낮없이 발생하는 데모와 당내의 신․구파 알력으로 대책이 없었다. 정치부 기자인 이형기 노조위원장은 민주당 구파의 서 모씨의 도움으로 기자들에게 봉급을 주는 사용주의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도 한계가 있었다. 돈줄이 막히고 이내 5․16 쿠데타가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1961년 여름 그는 대한일보로 가게 되었는데 소설가 廉想涉(염상섭) 선생의 아들인 염재용이 정치부장으로 있어 그가 권유해서였다. 정치부 차장으로 간 그는 어느 날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점거하고 있던 국회의사당(지금의 서울시의회 건물)에 나갔다가 특종을 한다.


혁명정부 쪽에서 누군가가 나와 기자회견을 하는데 앞으로의 정부가 「내각제는 아닐 것」이라는 말을 듣고, 이 말을 뒤집어 「새 정부는 대통령 중심제가 될 듯」으로 보도해 버린 것이었다. 계엄 하에 이런 추측기사를 쓴 대한일보는 정치부장이 당국에 불려 가는 등 소동이 났지만 얼마 후 발표된 것은 새로 탄생할 민간정부는 대통령 중심제란 것이었다.


그는 국제신문사로 돌아와 논설위원 겸 지사장으로 있다가 1973년 편집국장이 되어 부산으로 내려간다. 그러나 당시 일기 시작한 언론파동으로 1년도 안 돼 편집국장 자리에서 물러난다. 기자들이 언론자유 선언을 하는 등 금기사항에 도전해 국장이 인책된 것이다.


그 이후 논설위원으로 부산에 머물던 그는 1979년 서울로 올라와 서울지사장 겸 상무로 있었지만 1980년 언론 통폐합으로 신문 자체가 없어지자 결국 언론계를 떠나고 만다.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을 분명히 하는 그는 좋아하는 사람들과만 어울려 그로부터 경원당한 사람들은 지금도 그에 대해 좋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편파적이라는 것이다. 그가 부산에서 자주 어울린 시인은 허만하 김규태 손경하 등 동년배와 박응석 임수생 등 후배들이었다. 가끔 안부전화를 교환해 왔는데 건강이 나빠지고선 그는 주로 받는 편에 속한다.


이형기 시인이 첫 시집 「적막강산」을 낸 것은 데뷔하고 13년 만인 1963년이었다. 데뷔작품을 포함해서 50여 편이 실렸다. 여기에 실린 작품은 대부분 첫 회 추천작인 「비오는 날」의 테두리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고 했다. 『딴에는 몸부림도 많이 친 편이지만 「앉은뱅이 용 쓰는 노릇」 같았다』고, 1967년에 쓴 어느 글에서 고백하고 있다.


그 「비오는 날」의 테두리는 「자연발생적 서정」이라고 그는 1975년에 낸 세 번째 시집 「꿈꾸는 旱魃(한발)」의 自序에서 밝히고 있다. 그의 서정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세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시가 그것인데, 이는 지훈이 그에게 말한 「방치하라」는 것을 염두에 둔 긍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런 자연 발생적이며 방치된 것 같은 자연 수용은 오히려 한국적 리듬으로 절제되고 정제된 서정이라 할 만하다. 따라서 첫 시집에 실린 시들은 이형기 시의 가장 순수하고 건강한, 서정적 감동을 주는 시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그때의 시들엔 「설익은 생각, 설익은 느낌들이 설익은 그대로 우유처럼 녹아 흘렀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는 두 번째 시집인 「돌베개의 시」에서부터 세 번째 시집까지를 자신의 시의 전환기라고 적고 있다. 자연 발생적 서정을 부정하고 시 세계의 주조를 허무, 부조리, 꿈 등으로 채우기 시작한 것이다. 「꿈꾸는…」의 자서는 다음과 같이 이어지고 있다.


「…여기에 이르러 나는 비로소 시인이란 자각을 갖게 되었다. 시란 필경 언어로서 구축되는 가공의 비전이다. 가공의 비전, 꿈이 아닌가. 그러므로 나에게 있어서의 시인이란 자각을 꿈꾸는 사람이란 자각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의 꿈은 장미 빛으로 채색되어 있지는 않다. 어둡고 음산하다. 어떤 것은 지나치게 그로테스크해서 독기 같은 것을 느끼게 할지도 모를 지경이다…」


그의 어둡고 음산한, 그리고 분노가 서린 시들이 태어나게 된 배경에는 1960년대 말에서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의 현실 상황을 배제할 수 없을 것 같다. 그것은 그가 이 무렵 매일처럼 겪은 폐쇄된 사회의 답답함과 연관돼 있다. 당시 문학의 「순수와 참여」 논쟁에서 대부분의 문인들은 심한 갈등을 겪었는데 특히 언론계의 간부로 있던 그로서는 그 갈등의 폭이나 깊이가 유달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시는 이른바 「참여시」의 범주와는 다른 삶의 근원적인 문제에 천착해 있었다.


다음에 인용하는 「첨예한 달」이란 시를 읽어보면 1970년대를 겪는 선비 같은 이 시인의 그로테스크한 내면과, 세상을 내다보는 허무의식이 감지될 것이다. 악의에 찬, 범죄용어 같은 말들이 태연히 동원돼 있는 것이다.


「암살은 감행되었다/물증보다도 확실한 심증/심증보다도 더욱 확실한 것은/저 하현의 달이다//자객이 누구냐고 묻는가/피살자가 누구냐고 묻는가/보라 저기 저 고산 만년설에 꽂혀 있는/한 자루 비수/대답은 이미 소용없는 시간이다//눈물은 과거의 인류가 모두 흘리고/지금 남아 있는 것은/다만 이 첨예한 겨울 나의 노래/소리 없는 외마디 소리의 스타카토//드디어 밤은 절망한다/그렇다 밤은/죽지 않으면 다시 살아날 수가 없다/왕생하라 사자여/너를 축복하는 일편의 이미지/자객의 눈초리는 복면 속에서 빛나고 있다」


1981년에 낸 「풍선심장」이란 시집의 서문 「시인은 말한다」에서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그리하여 나는 비수를 갈듯 시를 썼다. 말은 비수라고 했지만 이 한 줄의 하찮은 시, 무력하기 짝이 없는 인간의 행위가 어찌 저 세계의 옆구리를 찌를 것인가. 나의 비수는 결국 나 자신을 찌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자기 암살에 의해 죽어버린 그는 결국 허무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허무를 딛고 새로운 자아를 탄생시키는 시를 쓴 것이다.


30代 이후 60代 전후까지의 그의 표현법은 세상과 삶에 대한 패러디로 일관돼 왔지 않았나 싶다. 그의 언어들은 의미가 명쾌하고 직설적이며 다분히 현실 비판적이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나 주변 환경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와 오래 이야기를 해보면 그의 화제는 대부분 시니시즘에 근거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허무의식으로 일관해 온 그의 시정신 때문이 아닌가 한다.


여섯 번째 시집 「죽지 않는 도시」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 대한 고발과 문명비평적인 시가 많이 읽혀진다. 「죽지 않는 도시」란 시집의 제목이 그런 것을 암시하고 있다. 「메갈로폴리스의 공룡들」이란 시의 앞부분을 인용해 본다. 따로 해설이 필요 없을 정도로 직설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대량생산 대량소비로 흥청대는/행복한 시민들은 버리는 것도 많다./먹고 버리고 쓰고 버리고/또는 먹지도 쓰지도 않고 그냥 버리는/쓰레기, 쓰레기, 쓰레기./쓰레기의 거대한 산더미에 깔려서/폐기장은 배가 터져 죽었다.…」


그러나 그는 1994년 여름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4년 가까이 투병생활을 하면서 시를 말로 했고, 그의 부인이 그 말을 받아 적어서 모은 것이 42편. 쪽수가 모자랄 것 같아 「시를 위한 아포리즘」이란 타이틀로 95편의 짤막짤막한 산문을 첨가해 시집을 낸다. 일곱 번째의 시집 「절벽」이 그것이다.


이 시집은 자아로 돌아온 시인의 노래가 주조를 이루고 있다. 많은 시에서 「나는…」 하는 말이 잡힌다. 사물을 보고, 사물이 이루고 있는 허무를 지적하고 그 근원적인 것을 구명하려는 종래의 자세에서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그 변화는 나의 내면이 어떻게 되어 있는가를 들여다보고 남에게 알리려는 자세로 돌아온 것이다. 그의 시의 세 번째의 변화로 보인다.


겉으로 보면 정갈한 서정시의 세계지만 이순의 나이에 든 자아에의 깊은 성찰이 읽혀진다. 『어느 새 빈털터리가 되어 나이밖엔 팔아먹을 것이 없는 그런 시인만은 되지 않게 해 달라고, 나는 늘 뮤즈에게 빌고 있다』고 말해 온 그가 와병 중에 쓴 「술래잡기-1」이란 시를 인용한다. 누군가를 찾아 헤매지만 찾아지는 것은 필경엔 「나」였다. 그러니 나를 찾는 것은 확실하고 허망한 노릇이라는, 삶의 허무와 부질없음에 대한 진한 시니시즘을, 우리는 이 시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이다.


「누군가를 찾고 있다/아무리 찾아봐야 허탕밖에 없는/아무도 없는 이 벌판에서/그래도 찾아야 할 누가 있나 두리번거리니/쉿! 저기 안 보이는 저기/숨은 듯 아닌 듯한 그림자/보니 그것은 나 자신이다/필경은 나를 찾는/확실하고 허망한 이 술래잡기!」


그는 그렇게 열심히 시를 생각하면서도 寡作을 했다. 함부로 시를 쓰지 않았고, 쓴 것을 쉽게 발표하지도 않는다. 50년이 넘게 시를 썼는데도 다 합쳐봐야 300편 남짓이다. 첫 시집 이후부터 거의 5년에 한 번 꼴로 시집을 냈다. 시집을 내면서 자신의 시론을 自序나 산문으로 알리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시에 관한 산문은 아름답다. 여섯 번째 시집 뒤에 쓴 산문 「다시 불꽃 속의 싸락눈」 중 일부를 인용한다.


「…고독과 고통은 시인의 양식이다. 도를 통한 사람, 또는 구원을 얻은 사람은 그 도통함과 그 구원 때문에 이미 배부르다. 따라서 그에게는 고독과 고통이란 양식도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시인은 得道(득도)하지 않기 위해, 求道(구도)하고, 구원에 이르러 안주하지 않기 위해 구원을 갈구한다.


…영감이란 어느 날 갑자기 시인을 찾아오는 불의의 방문객이 아니다. 언제나 시를 생각하고 있는 사람, 즉 온갖 준비를 갖추어 놓고 열심히 그를 부르고 있는 사람의 집에만 영감은 나타난다. 그러니까 영감의 출현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뮤즈가 아니라 시인 자신인 것이다.…」


『매달 시 잡지나 신작 시집들이 집으로 배달은 되고 있어요. 느끼는 건데 시인들이 시를 너무 쉽게 쓰는 것 같아요. 언어도 너무 헤프게 동원하고, 그러니까 무엇을 쓰려 한 것인지도 모르게 해놓고…. 시인 숫자도 너무 많은 것 같아요. 내가 듣기로는 한국시인협회 회원이 800명이랍디다. 현대시인협회의 회원까지 합하면 이 나라에 시인이라고 자처하고 다니는 사람이 1000명이 넘는 숫자가 되는 것 아닙니까?』


『저 양반은 선비 같은 분이세요. 평생을 집안 살림 걱정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집에서는 책 읽고 글쓰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모르던 분이지요. 예를 들면 유명인사에게 어떤 카드 회사는 카드를 만들어 보내 오잖아요. 그런데도 그걸 쓸 줄 몰라 결국 버리고 만 게 몇 번이나 있었어요. 경상도 남자 아니랄까봐 자상한 면도 없고, 게다가 통 말이 없어요. 그러니 하루 종일 함께 있어도 우리는 대화 한 마디 주고받지 않지요. 남의 집 남자들은 나이 잡수면 빈말이라도 말이 많아진다던데…』


부인이 우스갯소리를 하자 표정 없이 듣기만 하던 이형기 시인이 나무라듯 말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씰 데 없는 소리!』


집에 돌아온 나는 다시 그의 최근 시집 「절벽」을 뒤적거리다가 「시를 위한 아포리즘」에 이르러 다음과 같은 글에 오래 시선을 두고 있어야 했다. 시를 쓰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 같았기 때문이다.


「그대는 시를 몇 편이나 썼느냐고 어느 시인에게 물었다. 대답은 이러했다.―나에게는 오늘 쓴 이 한 편밖에 없다. 어제까지 쓴 시는 오늘의 이 한 편이 그 정기를 모조리 빨아먹고 빈 껍데기가 되어 버렸으니 거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리고 내일 시를 쓰면 오늘의 이 한 편이 그렇게 된다. 나에게는 언제나 오늘 쓴 이 한 편의 시가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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