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연애/ 정하해
이른 아침 창문을 열다가 놀라
자빠지는 줄 알았다
밤새도록 기어오른 나팔꽃 줄기가
딸을 슬어 놓았던 것이다
벌린 입술 속으로 발갛게 맺힌
이슬도 눈물도 다 맞는,
저 작품을 몰래 걸어 놓고 내려가다니
내 뼈에 호사 들었다
딸은 딸답게
은근히 창틀을 넘어올 태세고
실로 무례한 짓인데
마치 색다른 행성을 아는 것처럼
이 뜬금없는 사태가 그저는
아닐 것 같아
무섭지만
굽이굽이 서로 파고들다
이 맘 저 맘 거들떠보고 나면
황망히 질 거 뻔한데
그러는 나도 또 질 거 뻔한데
가느다란 저걸 몸에 꽂고 흥분하는
사내가 참 없어 보인다
- 『깜빡』 수록
* 화자는 이른 아침에 뜻하지 않게 손님을 맞았다. 창턱까지 올라와서 얼굴을 내민 손님은 나팔꽃이다. 여기까지 오른 것도 신통방통한 일인데다 오밀조밀하게 생긴 얼굴이 쳐다볼수록 참한 것이 어릴 적 딸아이 같기도 했겠다.
아이를 키우면 아이의 말, 아이의 행동 하나하나가 신비하게만 느껴질 때가 있다. 나팔꽃도 딸아이도 존재하는 자체로 이미 소우주인 게다. 그 세계를 엿보고 ‘내 뼈에 호사’가 들 만큼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은 생명에 대한 외경심과 다르지 않다.
청초한 나팔꽃과 순진무구한 딸아이를 겹쳐 보다가 화자는 머지않아 지게 될 나팔꽃의 운명에까지 생각이 미친다. 아무리 가깝고 소중한 인연이라도 멀리 보내거나 놓아야 할 때가 있다. ‘굽이굽이 서로 파고들’려는 욕망과 그것이 영원할 수 없다는 인식이 팽팽하게 맞서야 할 즈음에 화자는 끝을 흐려버리고는 ‘사내’에게 면박을 준다. 아무 생각 없이 보이는 사내도 속은 그렇지 않다고 대신 변명을 해주고 싶은 마음이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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