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꽃차례/ 장석남

톰소여와허크 2010. 12. 27. 21:49

꽃차례/ 장석남


조팝꽃이 피면 기침이 오지

오래된 내 몸뚱이의 관습

그맘때 한 이별이 있었지

허리를 쥐며느리처럼이나 굽히고

쇤 기침을 쏟고 나면 이른 노을이 잔칫집 같았지


조팝꽃이 지나가면 모란이 오지

자줏빛 옛이야기 같은 모란이 오지

이마 뜨거운 이 있을 거야

혼이라도 가슴 싸늘한 이 있을 거야

모란을 보면서 미워한 이가 있었거든

허나 모란은 일찍 지는 꽃


어느 아침 나는 서운히 서서

모란이 있던 허공 언저리를 더듬어보지

점잖은 호수와도 같이

후회는 맑고

꽃이 피고 지는 사이

모든 후회는 맑아

다시 한 차례 살아오르는

꽃 소식

- 『뺨에 서쪽을 빛내다』, (주)창비, 2010.


- 매화가 지고, 벚꽃과 목련이 이어서 피고 지고 봄이 무르익었다는 생각이 들 즈음 조팝꽃을 만나게 된다. 산에 들에 길가에 스리슬쩍 나앉은 조팝나무가 하얀 꽃을 무더기무더기 피울 때, 바로 ‘그맘때 한 이별이 있었’단다.

  이별이란 것도 지나고 나면 꽃이 피고 지는 것처럼 자연스런 일일 수도 있겠으나 그 순간의 고통과 상실감은 존재가 오롯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조팝꽃이 지나고 모란이 왔을 때 이별의 신열은 더욱 깊어진다. 안으로 삭이지 못한 회한이나 원망이 남아서 모란의 붉은 자태에서도 통증을 느낀다.

  모란이 지고 없는 날, 꽃이 있던 자리를 헤아리다가 비로소 화자는 타인에 대해 쓸데없이 미움을 키워 온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후회하는 마음이 된다. 이런 후회는 자신과 타인 모두에게 더 너그러워지는 선한 마음이다. 그런 점에서 모든 후회는 맑다고 거듭 말하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꽃이 있던 곳이 마냥 빈자리일 리 없다. 바람이 다녀가고, 햇살이 머물고, 누군가의 눈길이 닿았다가 스러지기를 수차례, 거짓말처럼 꽃이 다시 벙글어 있지 않겠나. 사랑도 그와 같지 않겠나.(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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