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빗방울/ 장인수

톰소여와허크 2012. 7. 26. 00:05

 

빗방울 / 장인수

 

 

 

 

빗방울의 속도가 온 세상에 가득하다

한 마리 뒤에 또 한 마리가 날고 있다

허공을 빠져 나가려고 한다

오늘 하루 종일

우루루 떼를 이루어 빗방울이 몰려다닐 것이라고 기상청이 말했다

지구는 빗방울에게 자신의 리듬을 맡긴다

빗방울이 온 세상에 발을 담그는 속도로

지상의 시간이 흘러간다

빗방울이 꽃잎에 붙었다가 소리 없이 떨어지는 몸짓

우산을 쓰고 쭈그려 앉아 상추밭의 풀을 매는 몸짓

창문을 열고 멍한 표정으로 침묵 한 잔 하며 먼 산을 바라보는 몸짓은

모두 빗방울이 만든 동작이며 시간이다

빗방울이 공간에 스며드는 속도로 시간은 흘러간다

 

- 『온순한 뿔』, 황금알, 2009.

 

 

* 열심히 사는 것과 쓸데없이 분주한 것은 생각보다 구별하기 어려운 과제다. 당장은 열심히 산다고 하겠지만, 과로와 피곤으로 몸을 망치는 일도 흔하고, 정작 돌봐야 할 것들을 소홀히 해서 낭패스런 일도 겪는다. 그렇다고 적당한 선이란 게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니 제 깜냥으로 열심히 살고, 지나치지 않은가 돌아보고, 더러 게으를 자유에도 눈을 주어야 한다.

  “창문을 열고 멍한 표정으로 침묵 한 잔 하며 먼 산을 바라보는” 시인은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의 흐름에서 벗어나 있다. 시간마저 돈으로 환산하는 자본의 생리와 셈법으로 보자면 전혀 생산적이지 않은 게으름뱅이 축에 든다.

  시인은 “빗방울의 속도”와 “지상의 시간”을 자기 식으로 셈하지만, 그 셈은 불친절하고 모호하기까지 하다. “빗방울의 속도”를 흐리게 말함으로써 독자가 머리를 굴리도록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서두를 건 없다. 부족한 건 시간이 아니라 마음의 여유다.

  빗방울에 날개를 주니 옛 작가(이태준)의 글방에 생각이 미친다. 파초에 비 떨어지는 소리를 놓칠세라 미닫이 위에 챙을 달지 못했다는.(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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