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벌게진 귀 / 손진은

톰소여와허크 2012. 7. 4. 11:32

 

벌게진 귀 / 손진은

 

 

이런 무안이 어디 있는가

잘린 둥치일 뿐인데

등뼈 휘어진 가여운 목숨일 뿐인데

옥수수 파 콩을 심은 밭 둘레

바람이며 개 고양이 막으라고

어깨동무하고 허리 껴안은 채 이마에는 나일론 띠 두른 채

발목 오그린 싸릿대일 뿐인데 느닷없는 가려움으로

한 줄 말씀처럼 찔끔,

설레던 공기를 밀어내며

하늘 뿔질하는 벌건 귀가 돋으니

나 불쑥 다른 길에 들어서 버린 것가

꺼멓게 말라가며 징역인 듯 잠인 듯 서 있으려 했는데

햇빛 달빛 끄댕이와도 몰래 눈 맞춘 적 없는데

갇혀 지내던 몸이 시방 제 안의 달디단 바람을 일으킨 것가

끊긴 핏줄이며 근육이 올라붙은 흙더미와 내통이라도 한 것가

허옇게 센 귀밑머릴 뚫고

웬 화끈거리는 깃발은 흔들어대나 말이지

모르게 붉어진 눈시울에 먼 하늘 담아 들고

뻘쭘히 커버린 키와 뜨건 알처럼 슬어놓을 흰꽃 그늘까지 퍼덕이며

저승꽃 늘어나는 옆 친구들 텃밭 속 주인들

쏘아볼 눈빛 어떻게 견디란 것가

사지를 빳빳하게 발기시키는 흙살의 수작이 허, 미운 봄이다

- 『고요 이야기』, 문학의전당, 2011

 

* 잘라 낸 싸릿대는 촘촘히 박혀져 밭 테두리 역할을 하며 나름의 필요에 쓰이고 있지만, 그 쓰임은 제한적이며, 그 존재감도 미미하다. 싸릿대는 중심에 들지 못하고 주변부에서 “꺼멓게 말라가며 징역인 듯 잠인 듯 서 있”는 운명의 상징이다.

  그런 싸릿대에 예기치 않은 변화가 생겼다. 죽었다고 생각한 몸에서 “벌건 귀”(움)가 새로 돋아난 것이다. “흙더미”가 밀어 올렸고, “먼 하늘”이 당겨 주었을지 모르지만, 자기 안의 내밀하고도 분주한 생의 의욕이 없었다면 애초에 가당치 않은 일일 것이다.

  화자는 “벌건 귀”를 “화끈거리는 깃발”로 표현하며 남의 이목을 끌게 된 것을 무안해 하고 달갑지 않은 일로 말하지만, 그 이면에 놓인 “사지를 빳빳하게 발기시키는” 생의 에너지를 부정하지 않는다.

  ‘벌게진 귀’가 자신도 살아 있다는, 자신도 생의 가운데 있다는 열렬한 표시라면 정작 미운 일은 따로 있을 테니.(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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