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 (1932-2006, 서울)
고 백남준 선생. 우리가 한국인이라고 말할 때 백남준이 있어 자랑스럽고 든든하다. 세계의 큰 별이 지다니 정말 애석하다. 그는 한국인 특유의 뚝심과 배짱으로 첨단 기술과 전위의 예술을 결합하여 비디오아트 창시자로 세계에 우뚝 섰다.
그는 우리 민족을 기마민족의 후손으로 보면서 앞으로 자꾸 뻗어 나가야 한다고 여러 번 언급했다. 1993년 작 '스키타이 왕 단군'이나 선재미술관에 있는 1995년 작 '기마민족'은 이를 대변한다. 또한 1999년 45분짜리 대작인 '호랑이는 살아 있다'도 바로 이런 우리 민족의 기백을 유감없이 발휘한 작품이다.
2000년 2월에 세계 미술의 메카인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백남준 세계' 전시회가 열렸다. 그런데 <뉴욕타임스>는 '백남준이 구겐하임을 점령했다'라고 제목을 붙였다. 이 말은 한국 작가가 미국을 더 나아가 세계를 문화적으로 점령(?)했다는 뜻인데 우리 역사에서 이런 쾌거가 또 언제 있었나! 그를 생각하면 자부심이 절로 생긴다.
일단 그의 예술이 이전 것과 다른 점은 움직인다는 데 있다. 그는 비디오아트를 통해서 한국 미학의 핵심인 '웅비하는 원초적 생명력'을 보여주었다. 20세기 아이들이 인상파나 입체파 그림을 보고 자랐다면 21세기 아이들은 비디오아트나 레이저아트를 보고 자랄 것이라는 예언은 빈 말이 아니다.
그는 여러 곳에서 공부한 박학다식한 사람이지만 우리의 '천지인' 사상을 삶과 죽음, 생성과 소멸의 법칙으로 삼았다. 서양의 몸을 동양의 마음으로 표현했고 서구 사상과 문명을 무교나 불교 사상으로 시각화했다. 또한 첨단 기술을 전위 예술로 승화시켰다. 한국적 색감인 색동을 비디오에 담았고 보이즈 추모제를 '오귀굿'으로 풀었다.
백남준은 가장 흡족한 작품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며 자신의 존재와 출신에 대한 자부심이 컸다. 꿈과 비전이 있기에 늘 청년처럼 살았고, 미래에 대한 끊임없는 구상으로 불안이나 불행의 신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1996년 뇌졸중이 와 작품 활동에 큰 불편도 겪게 되자 신이 자신의 예술에 대한 과욕에 고통을 주려 했나 보다며 농담 같이 흘려버린다.
백남준은 참여와 소통을 전제로 하지 않는 예술적 실천은 문화의 독재로 보았다. 그는 관객 참여 방식을 염두에 두었다. 1960년 독일에서 '피아노포르테를 위한 연구' 퍼포먼스 공연 중에도 보면 관객을 끌어들인다. 그 머리에 샴푸를 붓고 머리를 감긴다. 일종의 씻김굿이다. 이는 또한 고급예술로 변질된 모더니즘 예술의 계급화에 저항하는 것이기도 하다.
백남준은 5개 국어를 하는 세계시민으로 아침마다 전 세계 신문을 다 읽었다고 한다. 이 말은 그가 소통과 참여를 그 누구보다 중요시 여겼다는 뜻이다. 과천 현대미술관에 있는 '참여 TV'를 보면 마이크가 두 개나 설치되어 있는데 이는 그의 예술의 키워드인 참여와 소통을 뜻하는 것 같아 보인다.
그의 키워드 중 첨가할 것은 재미(fun)다. 웃기는 것만큼 예술적이고 창조적인 것이 있는가! 그의 몸짓이나 발설은 웃음과 재미에 치유력까지 더해진다. 지루한 일상을 사는 대중들에서 그는 보약이 되고 싶었나 보다. 백남준 얼굴에 심각한 표정이란 상상할 수 없다. 동네 꼬마들의 천진난만하고 기상천외한 장난기를 충실히 계승하고 있다.
백남준은 1998년 교토 상 수상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표현은 인간의 자유를 뜻한다. 예술은 인간의 배설적 행위이기 때문에 사회의 안전벨트 역할을 한다"
예술은 상처받은 마음을 낫게 하고 진정한 소통과 참여를 유도한다. 민족의 소통 단절인 분단과 자주적 참여에서 소외감을 뼈저리게 맛본 그로서는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우리들병원'에 소재한 백남준의 작품 '안심낙관'은 이를 상징한다. 또한 '장난꾸러기 나는 결국 이긴다'라는 말로 그는 늘 삶을 낙관했다.
그는 비디오 매체를 종이처럼 사용한 비디오아트의 창시자로 21세기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미켈란젤로로 비유되며 프로이트나 맑스, 피카소와 쇤베르크 그 이상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는 반세기나 앞선 선각자로 경계나 국경이 없는 인물로 지구촌을 안방처럼 만들고 첨단 과학을 예술로 승화시켰다. 신인류의 탄생을 예고했고 인터넷 시대를 예언했다.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수석 큐레이터는 존 헨하트는 백남준 작품의 특징을 '상황을 뒤집는 돌발성과 유머'에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는 아무도 시도하지 않은 것을 처음 시작한 사람이라고 추켜세웠다. 백남준의 말대로 예술가는 절반은 재능이고 절반은 재수라고 하지만 그가 정말 운이 좋은 것일까?
그의 예술은 60년대 독일에서 보이즈와 함께 '플럭서스'라는 불량 문화 서클에서 시작된다. 무명 시절 그의 영향은 미미했으나 지금은 그에게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은 없어 보인다. 요즘 첨단 전위 미술가도 다 그의 실험 범위 안에 있다. 그는 스승 존 케이지에게서 암시 받은바 '왜 안 되는가?(Why not?)' 그에게 시도 해보지 않을 반항이나 실험은 없었다.
그에게 낡은 규칙은 의미가 없다. 진정한 예술을 위해서 기존 규칙은 파괴하고 해체할 대상일 뿐이다. 1967년 뉴욕에서 샬롯 무어맨과 섹스를 음악으로 표현한 '오페라 섹스트로니크'에 대해서도 "섹스는 미술과 문학의 지배적 테마인데 왜 오직 음악에서만 금지되는가?"라고 반문했다. 그는 지독하게 인습을 싫어했고 시대의 터부와 철저히 싸웠다.
백남준은 1984년 TV 방영물 '굿모닝 미스터 오웰' 후 귀국 인터뷰에서 "예술이란 게 반이 사기입니다. 속이고 속는 거지요. 사기 중에서도 고등 사기입니다. 대중을 얼떨떨하게 만드는 게 예술이죠"라는 말로 파란을 일으켰다. 그의 특허품 같은 사기론은 사실 가짜 사기를 진짜 사기로 막는 이열치열의 어법이다.
백남준은 TV가 대중의 우상이자 총아가 되면서 정치적으로 악용되어 지배 도구로 변질될 경우를 경계했다. 순식간에 대중을 자석 같이 끌어들여 각가지 문양으로 조작하는 정보 독점을 사전에 막고 예술가로서 고등 사기로 선수를 치겠다는 뜻이다. 그는 대중들이 TV매체로 신화화된 인물에 빠지기 쉽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이것은 결코 인간이 기계나 물질문명보다 하위에 놓일 수 없다는 신념에서 온다. 인간은 상상력을 지닌 위대한 창조자이자 만물의 주인이다. 기계 문명의 우상화를 거부하고 오히려 이것을 조롱하듯 장난감처럼 가지고 논다. 그가 이미 우상화된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마구 부수고 신사의 상징인 넥타이를 자른 것은 같은 맥락일 것이다.
희대의 우상 파괴자인 백남준은 지구를 놀이터 삼아 첨단 기계를 미디어 매체를 장난감처럼 가지고 논다. 문명과 테크놀로지는 시끄럽고 차갑다. 그는 이런 기계의 물성과 금속성을 제거한 인간의 감정과 체온이 담긴 예술, 사람의 몸과 같이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예술을 지향했다.
그는 예술이 인간화되지 못하면 예술은 위한 예술로 전락한다고 보았다. 음악과 미술은 하나로 엮고 과학과 예술을 소통시키고 동양의 자연과 인간을 서양의 기계와 첨단 기술과 접목시켰다. 천지인 사상 네모, 세모, 동그라미를 하나로 만드는 세상을 꿈꾼다.
기계에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을 시도하며 인간화를 추구했다. 마치 조물주가 흙에 기운을 불어넣어 생명을 만들듯 백남준은 기계에 인간의 기와 영혼을 불어넣어 신예술을 창안한 것이다.
TV 브라운관을 점과 선처럼, 색채와 형태로 사용했다. TV를 종이처럼 자유자재로 오리고 붙이고 겹치고 하며 비디오아트의 넓은 의미의 조형 작업을 시도했으며 일찌감치 텔레비전의 위력을 감지하고 이를 예술에 도입했다.
그는 서양 과학의 최고 발명품인 TV 안에 모든 것을 담았다. 기술과 예술을 합쳐 인간 냄새가 나는 종합 세트로 바꾼 것이다. '달은 가장 오래된 TV(1965-67)', 'TV 부처(1968'), 'TV 브래지어(1969)', 'TV 첼로(1971)', 'TV 침대(1972)', '참여 TV(1982)', 'TV 정원(1982)', 'TV 깔때기'(1995, 아래사진), 'TV 스위스시계(1999)' 등 그에게 TV는 종이에 불과하다.
그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달은 가장 오래된 TV', TV가 없던 시대 한국인에게 달은 TV의 대체물이었다는 발상은 얼마나 신선한가! 토끼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각본은 있지만 보는 사람마다 달라질 수 있는 얘기다. 그래서 더 재미있다. '내 구멍 난 양말은 가난한 자의 TV'라는 장난기 어린 그의 발설은 정말 백남준답다.
그는 과학과 예술을 하나로 묶어 이미 오래 전에 요즘 유행하는 인터랙티브 예술을 실행했다. 'TV 붓다'는 바로 붓다라는 동양 사상과 TV라는 서양 기술의 상징하는 것을 비빔밥으로 만들었다. 이것을 '하나가 전체이고 전체가 하나다'라는 화엄 사상, 다시 말해 종파와 이념을 초월하여 융합하는 사상 이것이 바로 비빔밥 정신이다.
서양의 몸과 동양의 마음을 비비고 동서양 문화와 예술을 하나로 비비는 것이다. 이런 정신은 멀티미디어 네트워크 시대와 코드가 잘 맞는다. 백남준은 과감하게 한국의 비빔밥 정신을 현대미술의 기점으로 삼았다. 비빔밥 정신은 이렇게 소통과 통합을 체계화 하는 기호나 마찬가지이다. 이젠 아날로그와 디지털도 합칠 단계에 왔다.
그는 애국자였지만 '애국하면 나라 망한다'는 말을 했다. 애국을 하되 거리를 두자는 것이다. 그는 너무 노골적이지 않은 애국을 원했다. 국제주의자와 민족주의자의 비율이 반반이면 좋다고 했다.
사실 그는 어떤 정치가도, 그 어떤 경제인도 할 수 없는 일을 예술가로서 한국을 빛낸 애국자였다. 그는 조국을 위해서 한 일이 너무 많지만 조국은 그에게 해준 것이 없다. 이제는 우리가 그 빚을 갚아야 할 때이다.
그는 1990년 이어령 교수와 인터뷰에서 '이제 21세기에 우리가 뜸 들여 익힌 문화를 세계에 내보일 때'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한국 문화의 도약적 발전과 그 징조인 한류도 예언한 셈이다. 그는 자기 조국에서 큰 환영을 받지 못했지만 진정한 애국자였다. 이제 백남준을 발판으로 한류를 세계화하자. 그도 이를 그리 싫어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얘기를 마무리 해보자. 인간 백남준, 그 자체가 예술품이었고, 그 삶 자체가 행위 예술이었다. 헐렁한 바지와 큰 주머니가 4개나 있는 와이셔츠, 마치 거지 행색에 가까운 그의 코믹한 패션은 너무나 인간적이다. 치밀한 계산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지만 그는 이런 행색 때문에 문 입구에서 쫓겨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는 뒤샹처럼 개념 미술가이다. 그의 구상은 머릿속에 다 그려져 있다. 그의 작품이 계산할 수 없고 구입하기도 힘들다. 그렇게 그는 돈을 모르는 사람이다. 그는 세계적 작가임에도 늘 제작비가 없어 쩔쩔맸다. 그도 미국 제국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해 여러 번 치사하다고 토로했단다. 2000년 '구겐하임 전시회'도 교토 상 상금이 없었으면 힘들었을 것이라는 것이 후일담이다.
하여튼 그는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욕을 먹게 되어 있다고 봤다. 1984년 34년 만에 귀국해서 자신을 군사 정권에 밀려난 장면 박사로 빗대기도 했다. 주변에서 '철없는 엉터리 작가'라는 등 온갖 원색적인 비난에도 개의치 않았다. 그는 1998년 교토 상 수상 소감을 이렇게 피력하면서 그의 후회 없는 삶에 만족했다.
"나는 그동안 남보다 앞선 것만 하다 보니까 이해받지 못하고 파괴와 반항의 예술을 한다고 야단만 맞았는데 오늘은 칭찬을 받아서 기쁘다."(출처: http://blog.naver.com/paikstud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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