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점선(개성, 1946-2009)
아래는 계수미 기자의 인터뷰 내용을 일부 줄인 것이다.
[아직 항암치료 중이지만 그의 모습이 좋아 보인다. 목소리도 쩌렁쩌렁하다. 그는 지난해 4월 난소암 진단을 받아 곧바로 수술했다. 얼마 안 돼 간에 암이 전이됐고, 지금까지 수십 차례 항암치료를 견뎌내고 있다. 한동안 머리가 다 빠지는 항암치료 부작용에 몹시 시달렸던 그는 올봄 한의사의 처방에 따른 체질식을 하면서부터 몸이 많이 회복됐다.
“암에 걸리니 대학에 새로 간 것 같아. 쓸 데 있는 거 없는 거 구분하게 되고, 생활을 깨끗하게 정리해 창작에 더 몰두하게 되고. 더욱 진수만을 향해 살도록 단련하는 것 같다 할까. 또 좋은 게 있어. 전엔 사람들이 나보고 예의 없고 거칠고 거만하다 했는데, 이젠 약속을 안 지켜도 암에 걸렸으니까, 그러면서 봐주지 뭐야(웃음).”
레스토랑에 그는 노트북을 들고 나왔다. 인터뷰하는 사이사이 펜 마우스로 태블릿(사방 10cm의 손바닥 만한 그림판)에 계속 무언가를 그린다. 그리고 그림들을 보여준다. 예순이 넘은 그가 쓱쓱 그려 노트북 화면으로 보여주는 그림들. 아,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그는 컴퓨터에 내장된 그림을 판화지에 출력해 ‘디지털 판화’라 부르면서 전시회도 여러 차례 열고 ‘10cm 예술’이라 이름 붙인 책도 펴냈다. 7년 전 오십견으로 오른쪽 어깨가 아파 그림을 못 그리게 된 그에게 컴퓨터를 전공한 아들이 노트북을 사다주고 작업을 할 수 있게 도와줬다고 한다.
김점선은 3년 전 외아들을 장가보냈다. 그런데 아들 결혼식에 그는 하객으로 참석했다고 한다. 평소 즐겨 입는 티셔츠에 반바지, 운동화 차림으로. 결혼식장 신랑 부모 자리에는 아들 고모인 시누이 내외가 앉았다.
청첩장도 돌리지 않았지만, 입소문이 나는 바람에 작가 박완서·최인호, 피아니스트 신수정, 디자이너 앙드레김에 이르기까지 지인들이 참석해 이 ‘남다른 결혼식’을 목격했다. 김점선의 친정식구들도 넷이 왔다. 그가 기념일이나 관습적인 형식들을 챙기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것을 아는 친정식구들은 김점선 몰래 아들에게 전화해 결혼 여부를 확인하곤 했는데, 마침 전화했을 때 “다음 날 결혼”이라는 얘기를 듣고는 부랴부랴 참석한 것.
김점선은 이같이 ‘아주 특이한’ 엄마지만, 결코 나쁜 엄마는 아니다. 아니, 모두들 말로만 떠드는 이상적인 교육을 몸소 실천한 드문 엄마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시간을 들여 털어놓은 육아체험을 간략히 공개하면 이렇다.
“난 우리 아이 기를 때 공부 잘하란 얘기는 한 적이 없어. 장난으로라도 마약·도박은 하지 마라, 담배 멀리 해라, 이런 것들만 강조했지. 초등학교 4학년 아들 생일 파티에 친구들이 왔을 때 너희들 담배 피우지 마라, 했더니 아이들이 모두 뒤집어져. 웃느라고. 성적표를 보지 않았어. 성적에 대해 묻지도 않고. 10대, 20대엔 기본적인 윤리를 배우고 진짜 공부는 서른 넘어서 하는 거야. 60, 70까지 공부해야 해.”
아들은 사춘기에도 반항하거나 방황하는 일 없이 그와 잘 지내다가 고 3때 원서 한 장 써서 성균관대에 특차로 합격했다. 찌든 거, 싫어하는 거 없이, 많은 친구와 사귀며 지내왔고, 사람을 보면 누구에게나 웃는다고 그는 아들에 대해 자랑스럽게 말한다.
“난 아들을 아기 때부터 새끼다, 어리다, 이런 느낌 없이 대했어. 어린 사람의 형태를 띠었지만 영혼을 가진 사람으로 보았지. 그래서 닭 보고 꼬꼬, 개 보고 멍멍 하는 식의 베이비 토크는 한 적이 없어. 늘 어른에게 말하듯 했지. 아무리 부모 자식 간이라도 자기 영역을 지켜주고 선을 넘지 않아야 해. 다 까발릴 필요 없지. 아들이 수원 집에 혼자 살 때 간 적이 없어. 아들 결혼 후에도 한번 간 적 없고. 아이에게 평생 막말 안 해봤어. 남들한텐 별별 욕 다 하면서. 진짜 치사하지?(웃음)”
하지만 그는 “아들에게 늘 조금 줬다는 생각밖에 없다”고 말했다. “늘 더 많은 기회를 줘야 한다는 생각뿐”이라고. 그는 세상의 틀을 깨는 데는 용감무쌍하지만 좋은 엄마임에 틀림없다!
가족과의 즐거운 한때를 떠올리게 하는 작은 사진들이 곳곳에 보였다. 10년 전 세상을 떠난 그의 남편과 긴 머리를 하나로 묶은 다소 생소한 그의 젊은 시절 모습, 아들 내외와 함께 익살스런 표정으로 찍은 사진, 아주 짧은 머리를 한 그가 중학생 아들과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
“이건 93년 사진이야. 남편이 아들 데리고 용평 가서 놀다 왔는데, 친구들을 우르르 몰고 왔지 뭐야. 용평 한번 가면 2주일은 걸렸어. 그럼, 난 그 사이 낮엔 그림 그리고 저녁 땐 산책하는 내 생활을 할 수 있는 거지. 그런데, 속세 대표인 남편이 생각하기에 낮엔 스키 타고 저녁엔 술집에서 노는 생활이 무지 재미있었나봐. 집에 돌아오면 아무도 안 만나고 말라서 입술이 파랗게 수도승처럼 된 내가 불쌍해보였다나. 시끌벅적 어울리면 나도 행복해질 거라 생각했다는 거야. 어쨌든 맥주 몇 박스 시켜놓고 친구들이 24시간 우리 집에 눌러 있다 갔는데, 어찌나 화가 나던지. 꾹 참고 있다가 남편하고 아들이 배웅 나갔을 때 내 긴 머리카락을 가위로 삐죽삐죽 막 잘라버렸지. 돌아와 남편이 놀라는 걸 보니 속이 다 시원하더라고(웃음).”
기가 질려 뒷걸음질 쳐서 조용히 방으로 들어간 남편과 달리 아들의 반응은 확실히 다르더라고 한다. 약간 놀라는 듯하더니, 바로 엄마 옆에 앉아 “어떻게 그 머리가 유행인 줄 알았어? 요즘 프랑스 모델들은 다 그 머리해” 하며 “최첨단 패션이다, 엄마답다” 농담하고 웃더라고. 한 달쯤 지난 후 아들에게 “안 놀랐니?” 물어보니, 엄마를 본 순간 우리가 잘못했구나, 엄마의 작업실에서 우리 식대로 놀아 엄마가 너무 힘들었구나, 깨달아 위로해준 거라 했다. 예나 지금이나 그에게 집은 일하거나 자는 공간이지 친구를 불러 노는 공간은 아니라고 한다. 한 달이 채 못돼 그가 ‘머리 깎은’ 일이 주위에 알려졌고, 이후 그의 집에 남편 친구들은 오지 않았다.
남편은 아들을 산으로 들로 바다로, 전국 각지로 데리고 다녔다. 아이가 방학한 날 데리고 나가 개학 전날 돌아왔다. 아이 방학 때만 되면 그는 밥하고 빨래하는 일에서 벗어나 독신이 되고 자유인이 됐다. 하지만 그는 철저한 칩거형 화가였다. 아무 약속, 아무 할 일 없이 그림에만 몰입해야 ‘진짜 그림’이 나온다, 죽기 살기로 전부를 걸어야 그림이 나온다, 그는 고집스럽게 매달렸다.
“내 그림에서 내가 탈출하고 싶으면 굶곤 했지. 헛것을 보려고. 정상적인 의식 속에서는 못 보는 ‘의식의 파괴’를 경험하려 했어. 그때 같은 동네에 살면서 한문을 가르쳐주시던 이이화 선생님(사학자)이 오시곤 했어. 초인종을 눌러도 대답이 없으면 혼자 있는 거 다 알아, 하셨지. 대문을 열면 또 굶었구나, 사흘 이상 굶으면 단백질이 빠져나가 복구가 불가능해, 뇌세포가 죽어, 협박하시면서 먹으라고 난리였어. 한번은 닷새간 물도 안 먹고 굶었더니 세상이 노랗게 보이더라고. 전엔 내 그림에 희뿌옇거나 푸른 바탕이 전부였는데, 노란색 바탕을 쓰게 됐지. 당시 한 일간지에서 정현종 시인의 시에 맞는 그림을 그려달라 했는데, 붉은 맨드라미 바탕을 노란색으로 칠했어. 빨강이 더 강렬해보여 토속적인 냄새가 나더라고. 닷새 굶은 게 고작 노란색 바탕으로 끝났어. 시시하게(웃음).”
“사람들은 그냥 바탕에 노란색을 칠했구나 하지만 작가는 조그만 변화에도 정말 목숨을 건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면, 이처럼 ‘지독한’ 예술가인 그는 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일상의 굴레’ 속으로 들어갔을까.
“서른 넘어서까지 결혼은 생각도 안 하고 있었지. 그런데, 하루는 친구들과 모여 있는데, 김상유 선생님(화가·작고)이 우리에게 진지하게 결혼하라고 말씀하셨어. 부모 돈으로 배 채우고 물감 사며 사는 생활을 계속한다면 구역질이 날 거라고. 아기 기저귀를 빨려고 얼음물에 손 넣고, 콩나물 백원어치를 사면서도 부들부들 떨어보라고, 그런 후에도 예술이라는 게 될지 말지라고…. 조용히 듣고 있는데, 부끄러우면서도 머리 한쪽이 열리는 느낌이었어.”
그는 결혼하기로 결심했다. 남자를 두리번거리며 찾기 시작했고, 꼭 한 달 만에 찾아냈다. 후배들과 전시회를 자축하기 위해 모인 선배의 화실에서 목청껏 노래 부르는 낯선 청년에게 ‘필’이 꽂힌 것이다.
“노래를 듣는 순간 그만 반해버렸어. 한 소절이 끝나고 내가 ‘우리 결혼하자!’ 큰 소리로 외쳤지. 그랬더니 그 사람도 ‘좋다! 하자!’ 나만큼 큰 소리로 외치더라고. 그날 밤 여관에 갔고 일주일 후 방 하나 얻어 살림을 차렸지.”
그의 남편은 두 살 연하에 이혼남에 ‘백수’였다. 하지만 ‘고생하기로 작정한’ 그에게 조건은 아무 문제될 것이 없었다고 한다. 부모에게도 알리지 않고 그냥 함께 살았다. 2년 만에 아이가 태어났고, 아이가 백일이 지났을 무렵 남편이 몰래 동사무소에 가서 혼인신고를 하고 출생신고도 해버려 법적 가족이 됐다.
그는 처음 어떤 남자를 만나도 잘 살 수 있다는 자신감에 낯선 남자와의 생활을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빗물 떨어지는 단칸방에서 그에게 닥친 가난은 예상보다 훨씬 혹독했다. 남편이 가게를 열고 새로운 일을 벌였지만 번번이 빚을 안았다. 친정에서 돈을 얻어다 주는 일을 반복했다. 남편은 친구들과 술 마시고 돌아다니는 습성을 고치지 않았다. 그는 매일 밤 늦는 남편과 죽기 살기로 싸웠다.
“어느 날 남편이 난 능력이 없나 보다, 하며 두 손을 들더라고. 친정에서 돈을 더 가져올 수도 없는 형편이 됐을 때. 그래, 좋다, 이제 내가 그림을 그려 먹고살자 하고는 서울에서 떠나 경기도 산골마을에 들어갔지. 그곳에서 정말 굶어죽을 뻔했어. 첫 개인전 때 그림이 팔렸는데, 그 돈을 친구에게 떼였거든. 무일푼이 되니 평화가 오더라고. 술 먹자는 남편 친구들이 얼씬도 안 하니 싸울 일이 없어진 거지.”
남편도 그도 서로에게 점점 적응해갔다. 무엇보다 남편은 철저하게 그의 편이 돼주었다. 유치원생 친구 같았다. 그는 자신이 완성한 그림을 자랑하기 위해 남편이 들어오는 저녁을 기다렸다. 남편은 때로 ‘범상치 않은 이유’로 우는 아내를 달래주는 일도 곧잘 했다.
“난 ‘자뻑’이야. 내 그림에 내가 반해. 컴퓨터를 이용해 그리기 전엔 아름다운 내 그림이 곧 날 떠난다는 생각에 엉엉 울곤 했지. 남편이 날 다루는 법을 잘 알았어. 다리를 뻗고 눈물을 흘리고 있으면 남편이 말해. ‘걱정하지 마! 이 그림은 절대 안 팔려. 무식한 사람들이 이 그림을 알아볼 리가 없어.’ 내가 ‘진짜?’ 하고 물으면 남편이 ‘그래. 예전에 우리가 말했던 그거 돌아왔잖아. 사람들이 이걸 이해하는 데 30년은 걸려’ 했지. 그럼 ‘아, 됐다!’ 하고 밥하러 부엌에 나갔어.”
신문에 안 좋은 전시 평이 실려도, 자신의 그림이 낮게 평가받아 속상할 때도 그는 남편 앞에서 펑펑 울 수 있었다. 남편은 남과 다툼이 없는 성격이었지만 싸움이 잦은 아내를 개의치 않았다. 늘 그가 골라준 옷을 입고 다니면서 ‘화가 아내’의 감각을 믿었고, “우리 아들 지 엄마 닮아 공부 잘해요” 하며 자랑하고 다녔다. 그런 남편이 갑작스레 폐암 말기 진단을 받고 생을 마감했을 때 그는 “할 수 있다면 악마와 거래를 해서라도 남편을 살려내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남편은 작가 박완서의 사위가 주치의가 돼줘 삼성병원에서 죽음을 맞았다. 그전에 집에서 남편이 안락의자에 기대고 유언처럼 한 말을 그는 잊지 못한다.
“자기는 평생 동안 안 싸우는 어른이 꼭 한 명은 있어야 해. 그 어른을 박완서 선생님으로 정해. 죽을 때까지 박선생님하고는 싸우지 말고 살아!”
그 후 10년, 그는 “박선생님에게 무얼 일러바치거나 고자질은 많이 해도 대든 적 없이 착하게 살고 있다”고 자신한다.
“엊그제 박선생님을 만나 ‘지난주 세 명의 악마를 만났거든요’ 하며 이런저런 하소연을 했지. 선생님이 ‘악마는 무슨! 별 거 아닌데, 네가 화가 난 거지’ 하면서 ‘널 보니까 다 나았다. 네 목소리에 귀청이 떨어질 것 같아’ 하시더라고(웃음).”
시골에 살 때 이이화 선생의 한문 제자로 만난 박완서와 김점선은 둘 다 개성 사람이다. 김점선은 “개성 사람은 무조건 좋다”고 말한다. 다섯 살 때 피란 내려오느라 개성을 떠났지만, 그는 자신을 무척 아꼈던 할머니에 대한 기억, 고향 집에 대한 추억을 곱게 간직하고 있다. 폐암으로 남편을 먼저 잃은 박완서는 김점선의 남편에게 홍삼 달인 물, 버섯 달인 물을 가져다주며 치료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남편이 세상을 뜬 다음 날 김점선은 하혈을 했고 폐경이 됐다. 정신력이 강하다고 자부해온 그였지만 슬픔을 주체하지 못해 정신병원에 가고 싶을 만큼 괴로웠다고 한다.
“새벽 4시에 성당에 가면 항상 한두 사람이 먼저 와 있는 거야. 나보다 더 괴로워서 침상에 못 누워 있는 사람이 있구나, 생각하면 움직임 없이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보는 게 조금은 위안이 되더라고. 49재가 지나고는 다른 사람의 슬픔이 보였어, 우리 아들도 슬프구나, 그토록 좋아하던 아들을 두고 간 남편 자신도 슬퍼서 눈이 안 감기겠구나….”
적잖은 굴곡을 겪었음에도 그의 그림은 무척 밝다. 말·오리·토끼·고양이·나팔꽃·맨드라미…, 친근한 동물들과 식물들이 동심을 떠올린다. 행복감에 젖은 듯 부드럽게 미소 짓는 말, 경쾌하게 달리는 오리, 환한 꽃밭, 그 어디에도 어두운 구석은 찾을 수 없다.
“생활이 지치고 힘들 때 어린 시절의 기쁨, 환희의 기억들을 끄집어내는 거지. ‘아, 나는 행복해지고 싶다’ 하면서. 그게 없다면 음침하고 재미없는 일상을 어떻게 견뎌왔겠어? 워즈워드의 시 ‘수선화’ 같은 ‘브레인 파워’가 작품에 들어가 있어야 해. ‘어느 날 호숫가에서 수천수만 송이의 수선화 꽃무리가 춤추고 있는 것을 보았네’ 이것만으로는 안 되지. ‘이후에 외로이 침상에 누워 있을 때 그 꽃송이들이 마음에서 피어나 춤추네’ 이렇게 기억이 확장돼야 한다는 말이야. 나도 환희의 기억들을, 그 감동을 증폭시켜서 누구나 쉽게 느낄 수 있게 하고 싶어. 이 세상이 힘들고 썩었지만 그래도 좋은 게 굉장히 많다, 본질은 굉장히 아름답다 말하고 싶은 거지. 누구나 감성을 발달시켜 섬세하게 아름다움을 느낄 권리가 있고 그걸로 재충전을 할 수 있어.”
김점선은 미술의 대중화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다. 그는 작품의 ‘희소성’에 가치를 두지 않는 대중적인 작가다. 그는 자신의 유화를 먼저 사진으로 찍어 판화처럼 유통시켜 돈에 눈이 멀었다는 비난을 듣기도 했다 한다.
“40·50대가 경제적으로 안정돼 유화를 구입하는 건 재산적인 가치 외에 별 의미가 없어. 미술이 가장 필요한 건 아이 때야. 그림을 출력해 벽지에 붙이고 아이가 세 살 때부터 그 위에 자기 취향대로 막 그리게 해야 해. 그래야 독자적인 감각이 키워진다고. 우리 국민의 그림이 밀레의 ‘만종’ 아니야? 저작권 문제가 없어서 그런 거지. 그림의 대중화가 정말 필요해. 우리나라 화가들의 그림도 성냥통, 국수 싸는 종이에까지 많이 들어가야 해. 화가들이 많이 참여해야지. 그게 애국애족이야.”
가수 조영남은 “김점선은 나보다 30배는 더 괴짜다. 내가 김점선을 극도로 좋아하는 이유는 그의 탁월한 그림 외에 그 옆에만 있으면 내가 정상으로 어필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말을 듣고 김점선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다. 그는 자신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라 불안해하는 사람들 때문에 격식을 갖춰야 하는 자리엔 초대받지 못하는 일이 다반사라고 한다. 그런 그가 사람에 대해 갖는 ‘섬세한 떨림’에 대해서 털어놓았다.
“내가 용감해보이지만 상대를 어려워하는 게 있어. 대중을 대할 때는 막 얘기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수줍어해. 영혼을 접하게 되니까. 사람 속에는 멋있는 게 다 있어. 그래서 아무리 오래 알고 지낸 사람도, 왕이나 무명작가나 모두 어려워. 섬세한 떨림을 누구에게나 다 느끼기 때문이지.”
그는 작가 최인호를 만났을 때 느낀 감동을 또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루에 밀물과 썰물이 너무 심해 살 수가 없다는 거야. 그 얘기를 듣는데, 눈시울이 붉어져 얼른 다른 질문을 던졌어. 섬세한 감성을 가지고 이 세상을 함께 버텨나가는 사람에 대한 연민이랄까, 나이 들고 예술적 성취를 이루어가도 매일매일 생살에 소금 뿌리듯 아픈 것을 아무도 모르는구나 했는데…. 예술가는 인간 원형 그대로 살아 있어야 해. 틀에 얽매이지 않고 껍질이 굳어지지 않아 20대처럼 상처받고 격렬히 환희하는 게 소원인 사람들이지….”
김점선은 해가 지면 그림 그리기를 멈춘다고 한다. TV도 보지 않고 책도 읽지 않는다. 오로지 상상의 나래를 펴기 위해서. 가만히 자신의 몸을 누인 채 눈을 감는다. 그는 불면조차 즐긴다고 한다. 매일 밤 그는 다른 세상에 가 있다. “결혼 전 집에서 공상하고 있으면 우리 엄마가 ‘저년, 또 궁량질(궁리)한다’고 했지. 쓸데없는 생각만 한다고(웃음).” 기발한 그의 상상은 그림으로 나오고 글로도 풀어져나온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차창을 통해 본 하늘이 유난히 파랗다. 난 새가 아닌데 왜 하늘에서 날아야 해? 하늘에서 흰 뭉게구름 사이로 신나게 걷는 모습을 그린 그의 그림이 생각났다. 화가 김점선은 이 하늘을 보고 무얼 느낄까, 궁금해졌다.
* 김점선은 이제껏 내가 만난 사람 중에 가장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다. 겉모습은 터프하지만 속은 말랑말랑하고 여리다. 겉은 대범하지만 속은 섬세하고 여리다 … 한마디로 그녀는 그려내는 그림처럼 내 눈앞에 실체로 존재하는 아름다운 환상이다.(장영희 서강대 교수)
거침없는 말과 문장으로 우리 보통 사람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는 이 세상에 드문 괴짜. 뒤죽박죽인 것 같은 머리, 옷차림 속에 들어 있는 넉넉하고 따뜻한 사람. 난 참 복도 많다. 점선이가 내 친구라니.(피아니스트 신수정)
지루하고 고루하고 타성에 젖은 우리들의 삶을 파괴하여 색이 다른 그림을, 색이 다른 세계를 보여주는 예술가가 있다는 것은 행복하고 신나는 일이다. 김점선의 거침없는 색다른 표현이 나의 일상을 현란하게 수놓아 나를 행복하게 해준다.(시인 김용택)
누구나 자신을 닮은 말을 그린다. 김점선은 말을 닮았다 … 예순이 된 붉은 말, 그가 30년 더 저 광활한 벌판을 씩씩하게 달리면 정말 좋겠다.(시인 황주리)
김점선은 내가 알아온 많은 여자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몇 안 되는 여자들 중 한 사람이다 … 그녀는 따뜻하고 뜨겁고 여리다. 그리고 열렬하며 한없이 섬세하기까지 하다.(작가 김수경)
꽉 짜여진 틀 속에 법대로만 사는 수녀와 틀을 배반하며 멋대로 사는 자유인 화가는 도무지 안 어울릴 것 같아도 만나면 즐거운 게 신기할 정도지요? 그래서 극과 극은 통한다고 하는 것인지- 돌아서면 이내 보고픈 그리움의 여운으로 자주 못 만나도 우리는 좋은 친구입니다.(수녀 이해인)
- ‘김점선 스타일’ 중에서 ]
아래는 이인선 기자의 글이다.
[문학계에 이외수가, 대중음악계에 조영남이 있다면, 미술계에는 김점선이 있다. 독자적인 예술 활동에 두각을 나타내면서도 각 분야에서 기인으로 여겨지는 이들이다.
점심시간, 혼자 다른 메뉴를 시키는 것조차 눈치 보일 정도로 튀거나 다른 취향을 이해하지 못하는 몰취향의 사회. 어쩌면 그들에게 '기인'이란 딱지를 붙이며 내키는 대로 살지 못하는 용기 없는 자신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시대의 걸출한 '기인'이었던 김점선 화백이 63세를 일기로 우리 곁을 떠난 지 2년이 지났다. 꽃과 오리, 말 등을 소재로, 마치 샤갈처럼 우화적이고 독특한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
이화여대 철학과를 나와 미술과는 전혀 상관없는 인생을 살 것 같았던 그녀는 다시금 홍익대 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생전 그녀가 말했듯 자신의 이름처럼 '점'과 '선'으로 이뤄진 미술을 하게 된 건 숙명과 같았다.
헝클어진 머리와 시원시원하고 거침없는 말투, 호불호가 강했던 김점선의 개성만큼이나 화백으로서의 행보도 거칠 것이 없었다. 제1회 앙데팡당전에서 백남준, 이우환의 추천으로 파리 비엔날레 출품 후보에 선정되며 등단(1972년)한 후, 2년 연속 평론가협회 선정 미술 부문 올해의 최우수 예술가로 선정(1987~1988년)되었다.
그의 인생을 닮아 격식도 없이 자유로운 그림은 지극히 순수했다. 김점선 화백의 오랜 지인이었던 고 박완서 작가는 "대상의 위선을 걷어내고 직통으로 본질을 포착한" 그림이라며 그 순수성을 높이 평가한 바 있다. 그림 속 사물을 작가의 주관대로 과장하고 변형하는 기법을 미술 용어로 '데포르마숑(Deformation)'이라고 한다. 김점선의 대담하고 자유로운 그림의 특징이기도 하다.
왕성한 창작욕을 지녔던 김 화백은 개인전만 60여 차례를 열었다. 오십견이 와서 붓을 잡을 수 없을 땐, 노트북 그림판에 그림을 그려 판화지에 출력한 '디지털 판화' 작업을 시작했다.
그뿐인가. '10cm 예술' '나는 성인용이야' '나, 김점선’ '우주의 말' 등 10여 권을 왕성하게 저술해왔으며, 화장기 없는 얼굴로 KBS TV '문화지대'에 나와 약 1년간 진행자를 맡기도 했다.
2007년 암 판정을 받은 후에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담은 동화 시리즈를 기획해 1백 권의 그림동화책을 내겠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언급한 <우주의 말>을 비롯한 몇 권의 책은 다행히 출판이 되었다.
병환 중에도 쉬지 않았던 예술활동은 그의 평생의 작품이 그래왔던 것처럼, 인생의 굴곡과 깊은 고통 속에서 잉태되었기에 눈이 시릴 만큼 순수한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같이 순수하기에 그 아픔을 말없이 감내했는지도. 생활이 팍팍해질수록 그녀는 말과 오리, 고양이, 토끼와 수많은 꽃송이를 캔버스 가득 채워냈다. 어린 시절 환희의 순간들을 길어 올리고 사물의 본질을 포착한 순간, 비로소 김점선 식의 그림은 완성되었다.
김점선 같은 화백을 떠나 보내 활기를 잃은 예술계에, 그녀의 추모 2주기를 맞아 그녀가 책이 되어 돌아왔다. '김점선 그리다'(문학의 문학). 김점선을 아끼고 오랫동안 친분을 나눠온 지인들이 그녀를 그리워하며 적은 글과 더불어 그녀가 그린 그림과 글이 적힌 책이다.
김점선의 미발표 작품 12점, 고 박완서 작가를 비롯한 고 장영희 교수, 이해인 수녀, 정호승 시인, 최인호 작가, 사진작가 김중만 등 각계각층 인사들이 뜻을 모았다.
'그냥, 우리 전처럼 가끔 만나 쓸데없는 시간 보내다, 잘 가, 잘 지내, 하자. 그렇게 우리 같이 지내며 이 가슴 시리게 아름다운 세상의 찬가, 더, 조금 더, 불러보자.'(김중만) 김점선 화백과 얽힌 각자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이들의 그리운 한마디, 한 문장이 그녀의 그림과 김중만의 사진과 함께 가슴 뭉클하게 맺힌다.
김점선 화백과 오누이처럼 지냈던 권용태 시인은 몇 달 전, 경기도 광주 기여리에 위치한 사저에 '권용태&김점선 문화마당'이란 이름으로 자그마한 복합문화공간을 꾸몄다.
또 김중만 작가는 최근 캄보디아에 김점선 미술학교를 건립했다. 김점선기념사업회(회장 권용태 시인)와 플랜(Plan-개발도상국 아동 후원단체)과 손잡고 한번도 붓을 잡아본 적 없는 캄보디아 어린이들에게 그림을 가르치는 학교다. 지난 6월 28일 개교식과 현판식을 했고, 이곳에서 20여명의 아이들이 화가의 꿈을 키우게 된다.
해외여행 한번 해보지 않은 김점선이었다. 10여 년간 제주도에도 가지 않았던 그녀의 예술혼이 먼 땅 캄보디아에서 다시금 피어오른다.
"하늘나라에 있는 김점선 화백을 처음으로 해외 나들이를 시킨 게 아닌가. 자기의 예술 혼을 해외의 척박한 환경에 심어준다는 것에 대해 하늘나라에서 무척 기뻐할 거라 생각한다."(권용태 시인)
김점선기념사업회는 추모 3주기를 맞는 내년에는 좀 더 큰 꿈을 구상 중이다. 경기도 여주군에 위치한 화가마을에 김점선 미술관 건립을 추진하는 것과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일이다. 누구보다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많이 가진 김점선 화백의 이야기는 이제 새롭게 시작되고 있다.]
아래는 김점선의 글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 자신의 의지로 살아야 하는 때가 되었을 때, 나는 죽음 밖에는 떠오르는 말이 없는, 낙오자가 되어 있었다.
머릿속에는 잡념과 잡지식 만이 썩은 지푸라기처럼 쑤셔 박혀 있는 아웃사이더가 되어 있었다. 학교 다니는 일 외에는, 아무 준비가 안된 미숙아인 채로 졸업을 당했다. 나는 그런 자신을 숨기기 위해서 공부를 더 해야 훌륭한 사람이 된다고 외쳐댔다.
그리고 대학원에 입학했다. 아버지가 한숨을 쉬면서 등록금을 줬다. 그렇게 큰소리 치고 들어간 대학원에서 한학기만에 제적당했다. 맘에 안 드는 과목을 수강 거부했기 때문이다. 대학원에서 나를 가르치던 미국인 선생님이 나의 제적을 안타까워하면서 동료와 일할 기회를 주었다.
통역 일을 했다. 행복하지 않았다. 돈을 많이 받았지만 모으지 않았다. 다시 죽음과 마주섰다. 나의 삶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 때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림! 그림을 시작했다. 하루종일 그렸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그림 그리는 일뿐인 것처럼 그렇게 살았다. 행복했다. 제대로 된 길을 찾은 기쁨을 느꼈다. 다시 회화 전공으로 대학원에 입학했다. 그때 내 나이는 27살이고 지금부터 31년 전 일이다.
아버지는 나를 금치산자 취급을 했다. 누가 봐도 그렇게 생각할 만큼, 나는 헝클어진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럴 때 엄마가 나섰다. 무조건 나를 지원했다. 열심히 그림 그리고 학교 다니는데 그것만으로는 예술가가 안 된다고 했다.
결혼을 해서 인생의 쓴맛을 이겨내고 나서야 진정한 예술가가 된다고 했다. 맞는 소리 같아서 결혼했다. 집 나온 청년과 이름도 나이도 묻지 않은 채 결혼했다. 주변 사람들은 그런 나의 행동에 경악했다. 아이도 생겼다.
매우 가난했다. 우리가 굶는다고 해도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 내가 일부러 굶는 줄 알았다. 재미나 멋으로. 그럴 때 사는 길은 극도로 아끼는 것이다. 어쩌다 5만원 주고 그림 한 점을 팔면 정부미만 사고 반찬 사는 데는 돈을 한푼도 안 썼다.
동네에서 얻은 된장에 산에서 캐온 풀은 넣고 끓여서 먹었다. 그림 그릴 캔버스도 돈을 아끼려고 광목을 사다가 합판에 붙여서 그렸다.
그런 그림을 모아서 개인전을 열었다. 그림이 꽤 팔렸다. 일년 먹을 쌀을 사고 물감과 광목을 살만할 돈이 생겼다. 작업실이 따로 있을 리가 없다. 지붕에서 물이 새는 좁은 셋방에서 살았다. 그 시절에 그린 그림은 제일 큰 게 30호를 넘지 않는다.
100호 짜리 캔버스에 그림 그리는 게 꿈이었다. 비만 오면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고인 물을 버리느라고 밤을 새야 했다, 그럴 때 멍히 물을 바라보느니 그림 그리면서 밤을 샜다.
내가 살던 마을의 산과 들에 대해서 환하다. 어디에 무슨 나물이 있는지 언제 어떤 먹을 만한 풀이 나는지를. 그 마을에서 산을 식량창고로 생각하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그림 그리다가도 하루에 한 시간쯤은 산을 헤매면서 반찬감을 구해야 했다.
그렇게 살면서도 해마다 거르지 않고 개인전을 열었다. 그리고 꼭 일년을 버틸 만큼씩의 돈을 벌었다. 내 행동은 변함이 없는데 차츰 그림이 더 많이 팔리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100호 캔버스를 100개나 살 수 있게 되었다.
나는 해마다 전시회를 연다. 전시회는 내가 먹고살 돈을 버는 길이면서 또한 그림을 보여주는 기회이다. 그림은 경건한 예배다. 자신의 영혼을 만나기 위한 순례다. 내 영혼은 하늘이 내게 내린 숙제다.
평생 풀어나가야 할 대상이다. 내 영혼 속에는 가깝게는 나와 나의 부모의 경험이 축적되어 있다. 멀리는 구석기시대의 내 조상의 경험까지도 흔적으로 남아있다. 나는 내 영혼의 시각화에 몰두한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만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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