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릴 때는 졸아야 한다 / 표성배
졸릴 때는 졸아야 한다
(그게 주어진 졸림에 대한 예의다)
사실 사십이 지나도록
예의에 대해 모르고 살았다
망치에 대한 예의
프레스에 대한 예의
그라인더에 대한 돌에 대한 나무에 대한
물에 대한 바위에 대한 흙에 대한
공기에 대한 어머니에 대한
당신에 대한 심지어 내 자신에 대한……
내가 예의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다
우연처럼 희망적인 것이 없다
가만히 생각해도 생각나지 않는 일들이
우연처럼 다가왔을 때
그 기쁨이란,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기 위해
우연히 눌려져 온 시간
시간의 겹
시간의 무게
그 무게를 어느 날 훌훌 벗어버리듯
그렇게 나는 예의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예의를 예의답게 하는 것은
창문을 열지 않는 것이다
졸릴 때는 졸아야 하는 것이다.
- 『기계라도 따뜻하게』, 문학의전당, 2013.
* 머릿속 안개가 걷히듯 분명하지 않던 뭔가가 명료하게 정리될 때가 있다. 시인은 이것이 우연히 찾아와 기쁨을 주는 것으로 표현했지만 아주 우연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든다. 골똘한 생각과 사물을 편견 없이 보려는 노력이 알게 모르게 작용했을 성싶다.
“잠이 오면 나는 잠을 자”(박영민, 창밖에 잠수교가 보인다, 1985)라고 진즉에 노래한 이가 있었지만, 그 구절의 매력을 알아듣지 못하다가 “졸릴 때는 졸아야 한다”는, 그게 “졸림에 대한 예의”라는 말에 번뜩 정신이 든다. 자는 시간만큼 죽어지내는 거라고, 졸면 진다고, 그러니 열과 성을 다해 졸음을 쫓고 일을 하라는, 자아를 실현하고 경쟁에서 버티어 내라는 식의 말들을 자연스레 받아들이던 자신에게 뭔가 다른 신호가 감지된 것이다.
영화 <공각기동대>에선 진화된 기계가 인간과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는 장면이 나온다고 한다. 졸릴 때 졸 수 있는 여유, 그 여유를 방해하지 않는 너그러움이 있다면, 사람이 아직은 기계보다 낫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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