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먹는 점심 / 신현락
늦은 점심을 때우려고 식당에 들어섰다가
혼자서는 안 된다며 퇴짜를 맞고
돌아오는 길에 겨울비는 내렸다
우산도 없이 지팡이로 점을 찍고 가는 노인을 따라
시장 골목 국밥집에 앉는다
누군가의 어깨에서 떨어졌을
빗방울 점점점 얼룩진 바닥이 오늘의 내 자리다
수음하듯이 혼자 쓰고, 지워지고 구겨져서
휴지통에 버려지는 원고 같은 요즈음의 내 근황일지라도
마음에 점 하나 찍는 일조차 혼자 하기 싫을 때가 있는 법이다
흐려진 안경알을 닦으며 건너편 노인이
그윽한 눈빛을 건네온다
그 눈빛이 목에 걸릴 뻔하였다
그의 점과 나의 점을 이으면 무엇이 되는가
직선이 되는가, 저녁이 되는가
점묘파 그림 같은 풍경이 되는가
돌아보면 나 혼자만 점심을 먹는 게 아니다
여기에서는 대개 혼자 밥을 먹는 사람들
두 눈이 젖은 채로 허기가 점지해준
자리를 찾아오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창 밖은 셀 수 없는 빗방울로 붐빈다
행인들의 발밑에 깔리는 저 뭉클한 것들
눈에 밟히는 시간 속에 내가 점을 찍을 자리는
여기뿐이다, 라고 중얼거린다 식은 국물을 삼킨다
입을 벌리고, 바닥이 보일 때까지
우리는 점과 점 사이를 이어주는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의 눈을 적셔가며 혼자서 점심을 먹었다
- 『그리고 어떤 묘비는 나비의 죽음만을 기록한다』, 북인, 2015.
* 누가 좋아하는 음식을 물으면, 돼지국밥과 칼국수를 꼽곤 한다. 특별히 더 끌려서라기보다는 자취하던 시절, 자연스레 배인 습관 덕일 것이다. 자리를 넓게 차지하도록 반찬 가짓수를 늘여서 대접받는 느낌이 들면 혼자 먹기가 불편하다. 오히려 깍두기와 풋고추 정도만 곁들여 간단하게 끼니를 때우는 것이 퍽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람 벅적한 식당에서 사람 취급받지 못하고 시인처럼 퇴짜 맞은 경험을 간직한 사람일수록 밥을 말아서 빨리 해치우는 그런 식당을 좋아하지 싶은 것이다.
시인은 썩 유쾌할 리 없는 그런 경험에서 시 한 편을 얻어내고야 만다. 혼자 밥 먹는 사람들이 무수한 빗방울처럼 점과 점이라는 인식에 이어 “내가 점을 찍을 자리는 여기뿐이다”며 허름한 시장 골목과 혼자인 사람들에게서 동질감을 표시한다.
김광섭의 시 <저녁에>의 마지막 구절을 그림으로 차용한, 김환기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1970)도 점점이 점을 찍은 화면으로 유명하다. 점과 점은 섞이지도 스미지도 않고 각자의 방에 앉아 있는 것 같지만 눈을 조금만 흐린다면 경계는 불분명해진다. 점이 “서로의 눈을 적셔가며” 번지는 마술은 비오는 날이 제격일 것이다. 시장 어느 모퉁이 국밥집에서 막걸리 한 주전자 받아놓으면 눈은 필요한 만큼 또 흐려질 것이다. (이동훈)
'감상글(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물봉숭아 / 차영호 (0) | 2015.07.03 |
---|---|
멸치 / 박후기 (0) | 2015.07.01 |
항해 / 송유미 (0) | 2015.06.20 |
숙맥 / 임보 (0) | 2015.06.16 |
나는 지금 이곳이 아니다 / 문인수 (0) | 2015.06.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