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툴아, 우툴아
- 건축사회학 / 함성호
내 귀에서 너는 우주인이야, 너는 우주인이야, 하는 전파가 계속 들려와, 저 블랙홀에서, 일백사십구억구천구백삼삽만 년 전, 이 우주의 암흑을 깨치며 나타났던 빛의 화광 속에서, 혹은 다른 은하계에서, 팽창하고 있는 우주의 벽을 타고, 선운사 미륵님의 배꼽에 숨긴, 비결의 일점 일획에 실려, 아기 우주의 뜨거운 불꽃 속에서 녹지 않는 쿼크 속에서, 근해에서 오징어잡이하는, 낡은 목선들의 그 화안한 백열전등 불빛 아래서, 신돈이 명령하자 불은 콩에 밀려 솟아난
미륵의 입을 빌어
그리하여-
세상이 쑥밭이 되고
세계의 붕괴가 쓰레기 더미로 화한 뒤에
운주사 와불이 그 오랜 병석을 털며 일어나고
조선 팔도에 지천으로 깔린 미륵이란 미륵님은 죄다 땅속에서 그 발을 빼
그리하여-
또 다른 참언이 새 세상의 진인을 기다릴 때
우툴아, 얼른 발을 올려 말을 타고
바위를 열고 나오너라
그렇지 않으면 억새로 자르리
그렇지 않으면 억새로 자르리
- 『56억 7천만 년의 고독』, 문학과지성사, 1992.
* 이 시는 빅뱅 이론과 미륵과 관련된 몇 가지 전설에 대한 이해를 요구한다. 운주사 와불이 일어서는 날이나 선운사 마애불 배꼽에서 비결이 나오는 날에 망할 것은 망하고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라는 전설이 그것이다. 신돈 이야기는, 몇 가마의 콩을 미륵과 같이 흙에 묻고는 그 콩이 미륵을 지상으로 밀어 올리는 눈속임으로 신돈 자신이 미륵의 재현임을 믿게 했다는 거다. 이 콩은 우투리 전설을 매개한다.
아기장수 우투리는 태어나자마자 겨드랑이 날개로 선반까지 날았던 영웅이지만 관의 입장에서 보면 지배 세력을 위협하는 존재다. 관의 공격에 대응해 콩 한 말로 갑옷을 만들지만 한 알을 어머니가 빼먹어 치명적 약점(아킬레스건)을 갖게 된다. 또한 바위 속에 숨어서 콩과 팥으로 군사를 만들고 훈련시키다가 억새(우투리의 탯줄을 억새로 잘랐다고 한다. 바위를 쪼갤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기도 함)로 바위를 쪼갠 관군에게 들켜서 혁명의 꿈을 접게 된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염원이 우투리를 만들었다면, 현재 질서에 길들여진 마음이 우투리의 날개를 꺾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부처가 열반에 들고 56억 7천만 년이 지난 후 미륵이 온다는 용화세계는 이전의 세계가 무너져야 오는 세계다. 하늘과 뭍과 물이 오염되어 생명을 키우지 못하고, 핵과 쓰레기로 층층이 덮여가는 지구환경을 생각하면, “세계의 붕괴”가 먼 미래의 일로만 여겨지진 않는다. 또 한편 용화세계는 인심이 고르고 차별이 없는 세계로 알려져 있다. 그럼, 미륵은 수직적인 질서, 그로 인한 불평등과 차별이 다 무너지고서야 오는 것일 텐데, 그렇게 되도록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는 이를 “진인”이나 초인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시인이 우투리에게 “바위를 열고 나오너라”고 주문하는 것도 진인의 출현을 응원하는 마음일 테다.
그런데, 시인이 굳이 건축사회학이란 부제를 달고 연작시를 썼던 이유는 뭘까. 건축물에 설계자와 주인의 마음이 들어가 있는 것처럼 시란 것도 시인의 마음을 떠나 존재할 수 없다는 생각이 우선 든다. 그리고 어떤 건축물이든 어떤 시든 그 사회의 공기와 무관하게 존재할 수 없다는 메시지이기도 할 것이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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