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그 옷이 내게 / 김점용

톰소여와허크 2015. 10. 7. 22:18

 

 

그 옷이 내게 / 김점용

 

그 옷이 내게 말을 걸었다 나는 가끔 내 곁에 없는 혹은 죽은 사람의 목소릴 듣기도 하는 편이어서 처음엔 그저 그러려니 여겼다 그런데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금방 떠오르지 않아 찬찬히 짚어가니 내가 입고 있는 옷이 하는 말이었다

 

그 옷은 누가 입다가 준 것도 아니고 어디서 주워 온 것도 아니었다 백화점 정기 세일 때 신용카드로 산 싸지도 비싸지도 않은 그만그만한 옷인데 그 옷이 내게 말을 거는 것이었다

 

한번은 어떤 사람과 진지하게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바로 옆 의자에 걸어둔 그 옷이 그 사람의 뺨을 때리라고 개념에 빠진 놈은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고 나를 다그쳤다 물론 난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랬더니 욕을 했다 나더러 겁쟁이 돼지 새끼라고 욕을 했다

 

통행증을 보여달라는 수문장의 말에 뺨을 한 대 갈겼더니 그냥 통과시켜주더라는 선가의 이야기도 있지만 뺨을 맞아야 할 사람은 오히려 내가 아닌가 나는 그 옷이 말하는 걸 어떻게 듣는지 모른다 귀로 들었다고 생각하지만 등짝으로 들은 것도 같고 때로는 뼛속 깊은 곳에서 울리는 것처럼 들리기도 하는데 뺨을 맞는다고 내 귀의 위치를 정확히 알게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 『메롱메롱 은주』, 문학과지성사, 2010.

 

  * 대상의 상태나 변화를 빠르게 감지하는 사람을 촉(觸)이 발달했다고 한다. 시인의 연필 촉(鏃)이 힘을 내기 위해선 당연히 촉(觸)이 좋아야 한다. 촉은 내면의 것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 대한 순간적인 인식 반응이기도 할 것이니 시인은 촉을 다듬는 데 심혈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촉은 귀신이나 사물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는 영기(靈氣)에는 미치지 못한다. 시인은 “죽은 사람의 목소릴 듣기도 하는” 영기를 가졌으니 - 실제 그런지 아닌지는 묻지 말자 - 촉 있는 사람은 다 부러워할 만하다.

  시인은 자신의 “옷”이 하는 말을 알아듣는다. “개념에 빠진 놈”의 뺨을 때리라는 것인데,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따를 “나”도 아니다. “뺨을 맞아야 할 사람은 오히려 내가 아닌가”라는 구절로 “개념에 빠진 놈”과 자신을 동일선상에 놓았다고 볼 것 같으면, “개념에 빠진 놈”은 “나”의 또 다른 자아로 읽어도 되겠다. “나”를 다그치는 “옷”도 결국 남이 사준 것이 아니라 스스로 껴입은 것이니 역시 “나”의 또 다른 모습으로 간주할 수 있다.

  결국, 내 안에 ‘외골수 나’도 있고, 그런 나를 ‘공격하는 나’도 있고, 그 안에 ‘균형을 잡으려는 나’도 동시에 있는 꼴이다. 이런 해석도 촉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만 스스로도 크게 신뢰가 가지는 않는다. 뺨이라도 시원하게 한 대 맞고 깨달음을 얻고 싶지만 “뺨을 맞는다고 내 귀의 위치를 정확히 알게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라는 시인의 말이 묘하게 위안을 준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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