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물옥잠 / 권순자

톰소여와허크 2016. 1. 19. 11:59

물옥잠 / 권순자

 

어둠이 슈가처럼 달콤하게 퍼지는 사방

나른한 불빛이 설편처럼 날리고

조그만 눈동자 깜빡이며 초승달

담벼락에 올라 꿈길 헤쳐 가는 저녁

불안을 슬고 있는 악몽이 완행열차로 달리네

뻐근한 하루는 전신에 박혀 몸을 무겁게 누르고

불면은 오도 가도 못하는 잠을 방바닥을 뒹굴게 하곤

은백색으로 빛나는 환한 머릿속을 휘젓고,

젖어서 발견하기 어려운 즐거운 일들이 수면 아래로 숨네

춤추듯 다가왔다가 멀어지는 잠은 침묵을 낳기만 해

차가운 눈빛으로 별빛을 삼키지만

서걱이는 잠은 눈가에 대롱대며 매달려 있네

영혼의 지도를 찾아야겠어

첨단의 물가에서 버벅거리며 디지털 꽁무니 맴도는 짓 관두고

온몸 노출한 채로 파란 잉크처럼 꽃잎 올려

출렁이는 울음 터뜨려야겠어

 

- 『순례자』, 시산맥사, 2014.

 

 

  * 권순자의 <물옥잠>을 읽으면서 이용악의 <그리움>이 생각났다. 한쪽은 “느릿느릿 밤새워 달리는 화물차”에 그리운 마음을 실어 보내고, 또 다른 한쪽은 “불안을 슬고 있는 악몽”을 태우고 완행열차가 가는 것인 만큼 결국, 이용악을 불러낸 것은 추운 날씨 때문이었을 것이다.

  “잉크병 얼어드는 이러한 밤에/ 어쩌자고 잠을 깨어” 손에 입김을 모으고 모아서 글을 썼을 시인! 아, 그러고 보니 두 시인을 연결하고 시를 마주하게 한 진짜 이유는 기차도 아니고 날씨도 아니고...“잉크”였음을 알겠다.

  이용악 시인이 뼛속까지 추운 날로부터 그리움을 길어 올렸듯이 권순자 시인은 불안과 불면, 젖은 기억 속에서 “울음”을 길어 올리려고 한다. 그 울음은 물옥잠이 피워 올린 파란 잉크 한 잎이요, 그 한 잎의 시다.

  수면 아래로부터 부상하는 꿈과 욕망에 잉크를 먹여서 한 줄의 문장을 사려는, 영혼의 지도를 그려 나가려는 수고가 있는 한 물옥잠은 늘 새롭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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