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銀河水)에서 온 사나이
-윤동주론 / 천상병
1
깊은 밤
멍청히 누워 있으면
어디선가 소리가 난다.
방 안은 캄캄해도
지붕 위에는
별빛이 소복이 쌓인다.
그 무게로 살짝 깨어난 것일까?
그 지붕 위 별빛 동네를 걷고 싶어도
나는 일어나기가 귀찮아진다.
가만히 귀 기울이면
소리가 난다.
무슨 소리일까?
지붕 위
별빛동네 선술집에서
누가 한 잔 하는 모양이다.
궁금해 귀를 쭈삣하면
주정뱅이 천사의 소리 같기도 하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소리 같기도 하고,
요절한 친구들의 소리 같기도 하고……
아닐 게다.
저 놈은
내 방을 기웃하는 도적놈이다.
그런데 내 방에는 훔쳐질 만한 물건이 없다.
생각을 달리 해야지.
지붕 위에는 별이 한창이다.
은하수에서 온 놈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겁이 안난다.
놈도
이 먼 데까지 와서
하릴없이 나를 살피지는 않을 것이다.
들어오라 해도
말이 통하지 않을 텐데……
그런데도 뚜렷한 우리말로
한마디 남기고
놈은 떠났다.
“아침 해장은 내 동네서 하시오”
건방진 자식이었는가 보다.
2
비칠 듯 말 듯
아스름히 닿아오는
저 별은,
은하수 가운데서도
제일 멀다.
2억 광년도 넘을 것이다.
그 아득한 길을
걸어가는지,
버스를 타는지,
택시를 잡는지는 몰라도,
무사히 가시오.
- 『요놈 요놈 요 이쁜놈!』,답게, 1991. (《월간문학》71. 2.)
* 대취해서 쓰러진 게 아니라면 목에 갈증이 나서든 가슴이 답답해서든 오줌이 마려워서든 오밤중에 한번쯤 깨게 마련이다. 시인은 이를 별빛의 무게에 눌러서 깨어난 듯이 말한다. 시인다운 발상이지만 문제는 지붕 위의 인기척이다. 술이 덜 깬 시인의 착각이 아니라면 실제 도둑일 가능성도 높다.
시인이 이 가능성을 제외시킨 이유는 훔쳐갈 게 없어서다. 잃을 게 없는 사람은 쉽게 담대해진다. 그 순간 지붕 위는 별빛 선술집이 되고 거기 앉은 손님은 특정할 수 없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다. 도스토옙스키도 좋고 생텍쥐페리도 생각나지만 말이 통하지 않을 테니 다른 술친구가 좋겠다. 지붕 위이니만큼 별을 헤아리고 별을 노래했던 윤동주만 한 벗도 드물겠다.
이참에 윤동주 시집도 꺼내 보다가 그의 산문 ‘별똥 떨어진 데’의 끝 부분이 눈에 들어온다.
“어디로 가야 하느냐 동이 어디냐 서가 어디냐 남이 어디냐 아차! 저 별이 번쩍 흐른다. 별똥 떨어진 데가 내가 갈 곳인가 보다. 하면 별똥아! 꼭 떨어져야 할 곳에 떨어져야 한다”
이 구절은 자신을 성찰하고 행동을 고민하던 윤동주의 시편들과 다르지 않지만, 이미 큰별이 된 시인이 별똥으로 이 세상 다녀가는 동화가 그려지는 건 순전히 천상병 시인의 시에 이끌려서다. 윤동주와 천상병! 맞술은 못했지만 윤동주 시인은 상대가 가장 좋아하는 해장술로 초대를 했고, 저승 갈 여비도 걱정했던 천상병 시인은 반가운 손님이 무사히 자기 별로 가기를 바란다.
왜 하필 윤동주였을까 하는 의문이 사라질 즈음, 천상병 시인의 또 다른 시 한 구절이 아프게 찔러 온다. “이제 몇 년이었는가 / 아이론 밑 와이셔츠같이 / 당한 그날은……”(‘그날은’ 부분). 아! 그랬구나. 같은 고초를 겪은 사람만이 진정한 위로의 술을 나눌 수 있는 것임을……. (이동훈)
* 사진 속 부채는 천윤경쌤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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