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에 가는 길 / 김순진
엄마를 따라 오일장에 갑니다
악수하는 그림의 미군 구호품 밀가루 자루에
붉은 팥 두 말을 담아 머리에 이신
엄마를 따라 십리길 장에 갑니다
가을걷이가 끝난 들판엔 볏그루 움튼 싹 파랗고
비포장 신작로가 깡마른 코스모스 대공 까
입에 넣고 쫀득이하며 따라가는 길
나무 전봇대 성큼성큼 따라옵니다
엄마 제가 메고 갈게요
엄마가 안쓰러워 몇 번이나 졸랐더니
그래라, 우리 아들 얼마나 자랐나 보자
팥자루를 넘겨주십니다
우쭐한 마음으로 팥자루를 어깨에 얼러메는데
병기 수입포 누덕누덕 덧꿰맨 자리
무명실이 양잿물 빨래에 삭아
그만 터지고 말았지 뭐에요
붉은 팥 한 알에 종기 붉은 팥 한 알에 부스럼
붉은 팥 한 알에 허기 붉은 팥 한 알에 허깨비
붉은 팥 한 알에 가난…
그 나머지는 모두 사랑이지요
어머니와 나는 내 다우다 잠바를 벗어
모래밭 신작로에 흩어진 팥을 주워 담습니다
그때 주운 붉은 팥으로 액땜으로
이만큼의 언어들을 줍고 삽니다
- 『복어 화석』, 문학공원, 2013.
* 박수근 그림, <길> (1964년)이나 <귀로> (1965년)을 볼 것 같으면 머리에 함지박 이고 장에 가거나 장에서 돌아오는 어머니와 그 옆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따라가는 어린아이가 나온다. 박수근 그림에서 풍기는 정취가 이 시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여기에 모자간에 생길 법한 장면 하나가 쓸쓸하고 아름다운 추억을 재현해 놓는다.
그 쓸쓸함은 종기와 부스럼을 달고 사는 그 시절의 아이가 어머니에게 자신을 자랑할 절호의 기회를 놓친 것에도 이유가 있을 것이다. 거꾸로 그런 아들을 한껏 추어올리며 의기양양해 하는 아들을 뿌듯하게 지켜보았으면 좋았을 어머니도 낭패스런 상황에 적이 당황했을지 모른다. 누덕누덕 꿰매 쓰고도 낡아서 자루가 저절로 터지는 남루에다 팥 한 알 한 알 주워 담아야 할 궁색한 모습이 서로에게든 남에게든 면구스런 장면으로 여겨질 수도 있는 것이다.
시인에게 각인된 이 장면은 쓸쓸함도 있겠지만 그 이상으로 아름다움이 더 크게 자리 잡은 듯하다. 그 가난 말고는 “그 나머지는 모두 사랑”이었기에 따로 불만이 없다. 지금은 그 가난마저도 사는 데 힘이 되어, 남의 가난을 더 잘 이해하는 시인이 되어 “이만큼의 언어들을 줍고” 사는 걸로 좋게 받아들인다.
어차피 인생은 수수께끼. 그때의 팥알 하나가 허깨비를 진짜로 만드는 묘약이었을지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때의 낙심한 아이에게 바닥에 떨어진 팥알 수만큼의 액땜이 있기를 바라는 것은 가난한 사람끼리의 인지상정일런가.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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