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짝사랑2 / 황영진

톰소여와허크 2017. 10. 11. 18:23




짝사랑2 / 황영진

 

 

동부 시장 초입에는 닭집이 하나 있어서,

고등학교 이학년 때 그 집 소녀를 짝사랑했네.

아버지가 없었던 그 소녀네는

생닭을 팔던 엄마와 코흘리개 남동생이 둘 있었지.

소녀 엄마가 아픈 날은 소녀가 생닭을 잡았는데

산 닭의 날개를 불끈 쥐고 무심히 머리를 툭 잘라내었지.

닭 잡던 손으로 동생도 업어 키우고

닭 잡던 손으로 생머리를 매만지기도 했던 소녀

가끔은 까만 교복 치마 뒤에 솜 닭털이 붙어 있어

영락없이 동부 시장 닭집 아줌마의 딸이었던 소녀

엄마가 아픈 날인데 내가 가면 닭을 잡지 않았지.

귓불까지 발개진 소녀가 어두컴컴한 방 안으로 달아나면

소녀 엄마가 욕설 반 한숨 반으로 닭을 잡았지.

목이 잘려도 퍼득거리는 닭을 털 뽑기 기계에 넣으면

살아 있는 모든 닭들이 치를 떨며 버둥거렸고

닭 비린내가 술술 나는 그 집이 서러웠어.

꼭 한 번 같이 달아나

같은 이불 푹 덮어 쓰고

같이 한 번 펑펑 울고 싶었던 소녀

 

 

-『벽시계 안 밑구녕, 작은숲출판사, 2015.

 

 

* "친구가 똥물에 빠져 있을 때 우리는 바깥에 선 채 욕을 하거나 비난의 말을 하기 쉽습니다. 대개 다 그렇게 하며 살고 있어요. 그러나 그럴 때 우리는 같이 똥물에 들어가야 합니다. 들어가서 여기는 냄새가 나니 나가서 이야기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하면 친구도 알아듣습니다. 바깥에 서서 입으로만 나오라고 하면 안 나옵니다".

좁쌀 한 알 장일순(최성현)에 나오는 장일순 선생의 말을 메모해 둔 문장이다. 연민이나 시혜 의식으로는 친구의 마음을 살 수도 친구의 행동을 바꿀 수도 없다. 나도 너와 다르지 않다는 동류의식이 바탕이 되고서야 변화를 꾀할 수 있다는 의미로 새기고 싶은 명문이다.

짝사랑을 이야기하는 마당에 문득, 이 구절이 떠오른 것은 사랑도 결국, 그와 같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다. 생닭을 잡고, 닭 털을 교복 치마에 묻히고 다니는 소녀에게 깊은 연민을 가졌다면 이미 사랑은 물 건너갔을지 모른다. 닭 잡는 장면이 조금 생경했을지 몰라도 자신의 삶도 거기서 거기 매한가지라는 유대감 속에 우정이든 사랑이든 뿌리를 내릴 것이다.

소년의 마음과 다르게, “어두컴컴한 방 안으로 달아나는 소녀는 자신의 가계를 부끄러워한다. 가난 자체에 대한 원망도 있겠지만 생명을 없애야 먹고사는 어머니의 생업에 대한 불만과 하필이면 이성 친구 앞에 어머니 대신 궂은일을 해내야 하는 자신의 역할이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어머니의 한숨이나 닭 비린내 나는 그 집을 서러워하는 시인의 마음은 연민이 아니라 가난이 심어준 가난에 대한 이해다. “귓불까지 발개진 소녀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지 알 수 없지만 누구보다 가난을 깊이 이해하고 그 지극한 궁상까지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있지 않을까.

가난 경험이 없는 사람이 가난과 사랑에 대해 뭐라 뭐라 하는 것에 좀처럼 신뢰가 가지 않는다. 또한 가난의 편에 서서 가난 속에 무작정 견디거나 가난을 예찬하는 듯한 태도도 좋아 보이지 않는다. 삶이 털 뽑기 기계처럼 소름을 돋우는 것이라고 인식되면, “같이 달아나는 일도 요긴한 꿈이요 낭만이다.

시인은 다른 시에서 나는 아직도 잘 모른다/ 사랑은 왜 가난에서 오는지”(사랑은 왜 가난에서 오는가)라고 거듭 말한다. 수사적 표현이겠지만 사실, 가난에 대해서, 사랑에 대해서 어떤 자세를 취하는 게 바람직한지 자신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애매한 것은 애매한 대로 둔다.(연민은 이때 필요한 건가). 아마 지난 짝사랑에 대해서도 그러했을 것이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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