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산에서 / 조태일

톰소여와허크 2017. 10. 15. 20:05

山에서

- 국토 18 / 조태일


나는 늘 홀로였다.

싸움은 많았지만 승리는 늘 남의 것이고

남는 패배는 늘 내 것이었다.


배낭을 벗어 바위 곁에 놓고

신발을 벗는다, 양말을 벗는다.

좔좔 흐르는 물에 죄 많은 손발을 씻어내자

시리도록 시리도록 씻어내자.


고량주를 한 모금 빤다.

솔직하고 빠르게 폐부를 들쑤신다.

드디어 시야가 막히고

내 몸엔 검붉은 불이 붙는다.

검붉은 불이 활활 타오르고

<아서라 태일아, 해가 진다, 해가 진다, 어서 일어나거라>

아버님 목소리가 활활 타오르고,

눈물이 핑그르르 발등을 친다.

눈물이 핑그르르 발등을 친다.


앞산 뒷산 옆산이 다투어 다가서고

낙엽들은 내 옆에서 흩날리다 지고

山들이 조이니깐 하늘은

위로만 위로만 삐져나와 치솟는다.


고량주 한 모금에 담배 한 모금,

한 모금 빨아 머리 위로 날리고,

한 모금 빨아 앞뒷옆 산에 날리고

한 모금 빨아 물 위로 날리고……


- 『국토』, 창비, 1975.



   * 고향 떠난 지 삼십 년이 지났을 즈음, 시인이 기억하는 아버지는 “태안사의 중으로/ 서른다섯 나이에 열일곱 나이 처녀를 얻어/…/ 칠 남매를 낳으시고/…/ 젊은이들 모아 야학하시느라/ 처자식을 돌보지 않고/…”(‘원달리의 아버지’ 중, 『가거도』,1983)) 지냈기에 넷째인 시인은 아버지를 아버지를 부르지도 않고 데면데면 굴다가 10살 무렵에 아버지를 여의고 만다.

이후 시인은, 진보적 문예지 《시인》을 발간하여 김지하, 양성우, 김준태 시인을 등단시켰으나 곧 폐간당한다. 출판업을 통한 운동을 꾀하며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창립에도 주도적 역할을 해나가던 시절인 만큼 군사 정부에 의한 박해도 상당했을 것이다.“남는 패배는 늘 내 것이었다”란 말 속엔 공안 정국에 맞서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하고 있다는 인식도 있겠지만, 그 과정에 싸움의 주역이 되지 못하거나 내부의 문제로 실망스럽다는 의미도 희미하게나마 느껴진다.

안팎의 위기와 실망을 안고 시인은 산에 온다. 산에서 “죄 많은 손발을 씻어내”는 행위를 통해서 시인은 자신의 행동을 되짚고 새로운 각오를 다진다. 하지만 정작, 시인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을 이해해 주고, 자신을 지지해 주는 목소리였을까. 독한 술이 속을 태우고 독한 술이 시야를 흐린 뒤에야, 시인은 그 목소리를 생시처럼 듣고 눈물까지 흘리고 만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생전에 ‘태일아-’불러 주지 않던 아버지, 생전에 ‘아버지-’하고 말해 보지 않았던 그 아버지다. 아들을 일으켜 세운 목소리는 아들이 오래 전부터 이어왔을 내면의 쓸쓸함도 어루만져 주고 있다.

낙심해서 산에 온 시인은 이전의 것을 버리고 새로워질 준비가 된다. 산(山)은 한자 그림 그대로 기를 솟게 하는 장소다. 여기에 아버지의 진심을 시인이 수용함으로써 스스로 기를 받는다. 이제 산에 내려가도 이 기운이 자신의 삶과 주변에 좋은 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도 너무 오래전 이야기가 되었다. 아버지가 건너간 세상으로 주소지를 옮긴 시인, 부자 동행해서 나무 아래 술 한 잔 나누는 사이가 되어 있으려나.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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