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 세한도
고려청자 TG2171 / 임채성
까마귀 떼 목쉰 울음 등덜미를 잡아끄는
박물관 한 켠에서 내 하늘, 내 바다를 본다
어긋난 볼모의 시간 푸르게 벼린 서슬을
손대면 흐트러질까, 감쳐 맨 비색(翡色) 치마
배흘림 선을 따라 댓잎 장도(粧刀) 섶에 품고
학의 깃 상감에 새긴 너는 천생 고려 여인
나고 자란 붉은 흙이 얼마나 사무치면
저린 발 실핏줄에도 향토 빛 피가 돌까
달거리, 달거리하듯 금 하나씩 그어 가며
천 년을 곧추서 온 오롯한 몸씨 앞에
내 차마 글썽한 눈 붙박아 둘 수 없어
한 비사(祕史) 가슴에 안고 옷깃 여며 돌아선다
『세렝게티를 꿈꾸며』, 고요아침, 2011.
* 고려청자 TG2171 : 동경국립박물관 <한국관>에 있는 ‘청자상감매죽포유수금문병’(靑磁象嵌梅竹蒲柳 水禽文甁)의 전시번호.
- 시인은 ‘청자상감매죽포유수금문병’을 만나고, 마음이 사뭇 설렜나 보다. 내 하늘 내 바다를 닮은 비색 치마의 여인을 대하며 그녀의 기품을 눈에 익힌다. 비색은 물총새의 날개 빛을 닮은 푸른색이지만 그 뿌리는 고향의 붉은 흙이다. 숱한 잔금으로 남았을 흙의 흔적을 시인은 여인의 “저린 발 실핏줄”로 생각하고, 그 실핏줄 하나하나를 “나고 자란”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읽는다.
그럼, 시인은 이 그림에 세한도란 이름을 왜 주었을까. 우선, 문양에서 김정희의 세한도를 연상케하는 뭔가가 있었는지 모른다. 청자 이름 중 상감은 기법이요, 매죽포유수금은 문양이다. 한쪽에 매화와 대나무, 다른 쪽에 수초와 버드나무가 있어서 그 곁으로 새나 나비가 모여드는 그림이다. 세한도가 늙은 소나무와 젊은 소나무가 기대듯 있는 모습을 전면에 두었다면, 청자 문양은 큰 버드나무 밑에 수초가 깃들어 사는 모습이다. 둘 다 한쪽이 있음으로 인해 다른 쪽이 안녕하는 의미가 있다.
또 달리 생각하면, 세한은 추운 계절일 따름이다. 추사의 제주 유배가 그렇듯, 고향을 떠나서 원치 않는 공간에 볼모로 잡힌 인생이 속이 편할 리 없다. 시인은 숨은 비사를 말했지만, 슬픈 비사(悲史)에 더 가까워 보인다. 일본까지 갔던 추사의 세한도는 우여곡절 끝에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고려청자 TG2171로 분류된 ‘청자상감매죽포유수금문병’의 운명을 생각해줄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전통 가락에 얹은 시인의 목소리가 반갑게 느껴지는 이유다. (이동훈)
'감상글(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 소리 / 김혜숙 (0) | 2018.05.03 |
---|---|
농담이라는 애인 / 조유리 (0) | 2018.04.22 |
印朱빛 / 정진규 (0) | 2018.04.05 |
르네쌍스 / 문인수 (0) | 2018.03.27 |
염소 혹은 인텔리 / 김혜순 (0) | 2018.03.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