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르네쌍스 / 문인수

톰소여와허크 2018. 3. 27. 21:55



르네쌍스 / 문인수



   동구시장 입구 삼거리 코너 건물, 이 연립상가 이층에 내 단골 다방이 있다. 어느 기숙사 구내식당용으로나 쓰던 건지, 헌 호마이카 식탁 여섯 개가 일고여덟 평 공간을 엉성하게 메우고 있다. 식탁마다 비닐 커버를 씌운 철제 의자가 어수선하게 딸려 있고, 시퍼런 활엽 화분 몇 개가 여기저기 마지못해 놓여 있다. 사십대 중반? 갈 때마다 주인여자 혼자다. 혼자 책 읽다가, 먼 데서 떠오르는 듯 천천히 일어선다. 일어서는 바람에 떨군 마른 티슈 낱장처럼 희끗, 웃는다. 웃을 뿐, 도대체 뭔 말이 없다. 소리가 없는 여자는 그렇게, 어쩌다 간혹 들어서는 손님을 썩 반기지도, 그야 물론 박대하지도 않는다. 손님이 나갈 때도 여자는 천천히 진공 상태 같다. 여자한테 아마도 작은 뱃전에 매단 폐타이어 같은 완충이 항상 붙어 있는 게 틀림없다. 화장기 없는 답답한 얼굴, 여자는 늘 흰 블라우스에 검정 주름치마다.

나도 늘 같은 자리에만 앉는다. 찻길, 그리고 시장 쪽 창가다. 창밖 채소·과일 노점들, 노점 할머니며 장 보러 나온 주부들, 집에 가는 학생들, 저기 신호등이며 얼룩덜룩한 횡단보도며 차량들, 복잡하게 엇갈리는 사람들, 옥신각신하는 볼일들이 데면데면 다 내려다보이는 포인트다. 그러나 바깥은 참 오랫동안 변화라고 모르고, 축제도 모르고…… 여자와 나는 또한 몇 해째 서로 성씨도 모른다는 것 아니냐.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은, 아무것도 모르는 세월이다. 썩지 않는 평화야 없겠지만, 이 다방 안에서는 어쨌든 다시는 그 누구도 망할 일 없을 것이다. 그 어떤 ‘부흥’도 들이닥칠 리 없는 이 편한 자리, 나는 걸핏하면 ‘르네쌍스’의 관람석에 갇힌다.


  -『적막 소리』,창비,2012.

 


  * 시인이 종종 다니던 곳에 동구시장이 있는 건 알지만 르네쌍스 다방이 있는지 또, 거기에 말수 적은 주인이 실제 있는지 없는지 알지 못한다. 호기심이 이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설령, 실제가 아니더라도 서운해하거나 실망할 일은 아니다. 시가 풍기는 정취를 만끽했으면 그만이다.

다방 이름은 낯설지 않다. 6.25 전쟁 때 피난지 부산의 하고많은 다방 중 하나가 ‘루네쌍스’다. 1952년에만 문신의 개인전, 이중섭, 한묵 등의 그룹전이 있었다고 한다. 피난지 대구 ‘르네쌍스’도 있다. 박용찬이 음반을 가져와 개업한 곳으로 음악 감상을 겸한 다방으로 외신에 소개되기도 했다. 이중섭은 부산과 대구의 르네쌍스를 다 경험한 인물이다. 르네쌍스는 1959년 종로로 옮겨 가 전성기를 연다.

시인이 찾는 르네쌍스 다방이 이전의 르네쌍스와 어떤 연결고리를 가질 개연성은 적어 보인다. 다만, 사람이 붐비고, 이왕이면 예술과 인문의 향기가 그윽한 곳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이름에 투영되었을 거라고 짐작한다. 하지만 르네쌍스 다방은 ‘쌍’이 ‘상’으로 바뀌어가는 현실에 적응하지 못했는지 처음의 기대와 생기를 잃고 있다. 주인 여자도 “마지못해 놓여 있다”는 활엽 화분을 닮아 장삿속을 전혀 보이지 않고 그림처럼 있을 뿐이다. 늘 같은 얼굴, 늘 같은 복장을 하고 웬만해선 들뜨는 일도 없다. 이 점은 “늘 같은 자리에” 앉는 시인과 통하는 면이다.

   변화에는 동력이 필요하고 그 과정에 소란이 따르게 마련이다. 그런 소란이나 잡음이 더 나은 세상으로 가는 진통인 점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사람이 없는 자본, 인문이 없는 인문학처럼 요란스레 부흥의 포즈만 취하고 알맹이가 없는 경우도 생긴다. 시인은 이런 일에 덤덤하기로 한 걸까. 흥하지 않는 곳, 흥하지 않으니 망할 일도 없는 이곳이 시인은 편하다. 겉보기엔 부흥하려는 열정이 빠져나간 모습이지만, 예의 “관람석”에서 조금 더 분위기를 익히고 앉아 있으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르네쌍스엔 시인의 연필 끝에 생의 이면을 깊이 보려는 열정이 소리 없이 끓고 있다고.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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