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책)

<에세이> 명정 40년

톰소여와허크 2018. 6. 21. 02:16





변영로, 『명정 40년』, 범우사, 1977(서울신문사, 1953)

 

- 변영로(1898-1961)는 술꾼 문인의 계보에서도 선두 주자로 꼽히는 사람이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인 손기정 선수의 기사를 보내면서 현진건은 신문에서 일장기를 지운 일로, 변영로는 잡지에서 선수의 다리만 게재한 이유로 핍박을 받아 직장을 떠난 걸로 알려져 있다. 양심과 신념에 충실할수록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는 시절, 최소한의 밥벌이를 위해선 침묵하거나 시빗거리를 주지 말아야 할 것인데 이러한 저간의 사정도 술을 푸게 한 요인일 수는 있겠다.

『명정 40년』은 어디까지나 술에 대한 기록이다. 이 책을 낼 때만 해도 시인은 건강을 자신하고, 술에 대해서 남에게 지기 싫었을 것이다. “보통 건강으로 나같이 몇 십 년을 하루같이 마셨더라면 벌써 총중고골(塚中枯骨-무덤의 해골)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술을 마시는 것이 ‘수’(手)가 아니라 잘 배기는 것이 첫째다. 하루 먹고 하루 병이 나는 것은 술이 아니다. 이틀 사흘 앓는다면 더욱 술이 아니다.”고 했으니 이 기준에 따르면 내가 마시는 건 술이 아닌 게 분명하다. 시인도 말은 이렇게 하지만 이 책 내용을 보면, 만취해서 길거리에서 동사할 뻔한 이야기 등이 주를 이루고 있으니 술이 세다고 말하긴 무색하다. 몸을 아끼지 않고 뒤를 계산하지 않고 폭주를 마다하지 않는 정신만 높을 뿐이다.

탁족 끝에 대취한 알몸 4인방(오상순, 염상섭, 이관구)이 소를 타고 마을로 내려온 일은 이 책을 통해 널리 알려진 뉴스가 되었지만, 4인방 중 염상섭, 오상순과의 또 다른 기행도 소개되어 있다. 전철에서 다른 사내들에게 염상섭이 싸움의 발단을 제공했지만 정작 도움 안 되는 염상섭은 맞은편 전철로 보내놓고 시인 혼자 감당했던 1:3의 격투 신은 젊은 날의 호기를 보여주는 무용담으로 손색이 없다. 오상순과의 또 다른 일화는 1953년 간행된 책의 표지 그림에 묘사된 대목이기도 하다. 사공에게 배를 띄워 놓게 하고, 담배 50여 갑을 안주해서 양주 수 병을 해치우다가 추위와 담배 연기에 시달리던 사공의 독촉으로 자리를 파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 뱃놀이 사건은 표지 그림 한쪽에 있고 실제 표지 전면은 술잔을 든 변영로 시인의 전신상으로 처리되었다. 술에 얼마쯤 취해 흔들리는 느낌마저 불러일으키는 멋들어진 솜씨는 당대 최고 만화가이자 삽화가인 김용환(1912-1998)의 작품이다. 문화재로 등록된 코주부 삼국지의 주인이기도 하지만 격랑의 근대사를 지나며 자의 반 타의 반 일본, 북한, 남한 체제에 복무한 경험이 있고 다시 도일하는 쓸쓸한 모습을 보였으니 후대의 평가가 조심스러운 면이 있다. 그도 이 그림을 그릴 때 시인처럼 술로 한 세상을 건너고 싶지 않았을까 싶다.

그저 세상을 희롱하며 산다는 평을 의식했는지 변영로 시인은 자신이 모랄리스트로서 “모랄리즘은 남이야 나의 말을 믿든 말든 나의 생활의 신조”였다고 했고, 운명에 굴하지 않는 “부단한 반발 정신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도 했지만 가혹한 시대는 예술가의 운신의 폭을 제한시켰을 것이고, 술이 그에 대한 저항인 면도 분명 있을 줄 안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