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책)

<평전> 백석 평전

톰소여와허크 2018. 7. 26. 15:06




이동순 시인이 『백석 시 전집』을 엮은 후, 30년이 지나는 동안, 백석은 이전에 동향의 선배인 김소월이 가졌던 위상에 버금가거나 어떤 면에서는 더 나아간 느낌도 준다.
백석 시집을 몰래 읽었던 신경림 시인은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을 만나고 “그 자리에 서서 읽고 나는 너무 놀랐다. ‘시란 이런 것이로구나.’ 아마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던가 싶다”(『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라고 했고, 화가 조셉킴은 오른손을 스스로 못 쓰게 만들고 실의에 빠져있던 중 백석의 시를 읽고 힘을 얻는다. 이후 백석의 시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을 왼손으로 여러 편 그리게 되면서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다. 백석에 대한 지극한 사랑으로 화가는 『백석 평전』(미다스북스)까지 쓰기도 한다. 백석의 제자였던 강소천의 동요에 빠졌던 경험, 음악가이기도 했던 아버지 김정대의 증언으로 대중가요와 백석 시의 영향 관계를 말하고 있으나 구체적 증거가 더 있어야 할 듯하다. 그럼에도 화가의 특별한 생애와 그림을 감상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읽고 보는 즐거움이 있다.
백석에 대한 많은 글 중에 이동순 시인은 안도현의 『백석 평전』(다산책방, 2014)을 높게 평가한다. 몇 장면을 들여다보자. 평북 정주의 두 천재 시인, 소월과 백석은 직접 만나지 못했지만 스승인 김억과 조만식 등을 통해 연결된다. 김억을 통해 소월의 노트를 본 백석이 「소월과 조선생」(조선일보, 1939.5.1)에서 그때 노트에서 본 「J·M·S」를 소개한다. 이후 「소월의 생애」(≪여성≫,1939. 6월호)에서 자신이 들은 소월의 생김새와 술버릇까지 묘사하는 글을 발표한다.
안도현은 연대별로 백석과 주변인물의 삶을 따라가면서도 백석의 시와 함께 산문도 적절히 인용하고 평하면서 백석이란 인물을 입체적으로 이해하게끔 한다. “그저 한업시 착하고 정다운 가재미만이 힌밥과 빩안 고치장과 함께 가난하고 쓸쓸한 내 상에 한 끼도 빠지지 않코 올은다”(「가재미·나귀」(조선일보,1936.9.3)란 수필 전문을 인용한 후 다음해 함주시초 다섯 편 중 하나인 「선우사」는 “앞서 발표한 수필 「가재미·나귀」의 시적 현현으로 여겨진다”는 평을 남김으로써 독자들이 실제 비교해 보면서 읽는 재미를 준다. 「북관」에 대해서는 시인이 지리적인 설명 대신에 음식으로 지명을 떠올리게 했음을 말하고, 「산곡」에 대해서는 “겨울방학을 보내려고 미리 산골에 있는 집을 구하러 간 경험을 시로 쓴 것이다. 호젓한 북관의 산골로 들어가서 백석은 마음껏 게으르게 겨울을 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며 간결하게 평한다.
월북 후 백석의 작품 활동과 행방에 대해서도 이전보다 소상하게 밝힌 점이 눈에 띈다. 운동성도 좋지만 작품성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는 백석의 온건한 입장은 주체문학이 주류가 된 사회에서 곧 배제된다. 생존을 위해서 선동적인 시를 쓰지 않으면 안 되었고, 1962년 이후에는 아예 글을 접어야 했다. 나머지 생애는 삼수군 협동농장 등에서 일꾼으로 전전하다가 1996년 1월 여든다섯 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해 백석의 연인이었던 자야(김영한) 여사는 법정스님에게 자신의 전 재산인 요정을 기부해 1년 뒤 길상사가 들어선다.
자야 여사 이야기는 『내 사랑 백석』(문학동네, 1995)을 보는 게 좋겠다. 이 역시 『백석 시 전집』을 엮은 이동순 시인을 여사가 직접 찾아온 게 계기가 된다. 두 사람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수차례 편지를 주고받는 과정을 거쳐서 책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백석과 자야는 함흥과 서울 청진동과 명륜동에서 세 번의 이별이 있었고, 그 사이 백석의 세 번의 결혼이 있었다. 그 세 번의 결혼에 자야 여사가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대했는지 그때 백석의 태도는 또한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흥미롭게 읽히는 책이지만 자야 여사 입장에서는 긴 슬픔의 이야기이겠다.
앞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에 나오는 ‘아내와 같이 살던 집’을 자야 여사는 청진동 시절의 집으로 확신한다. “서울의 청진동, 조용하고 막다른 뒷골목에 불과 11칸짜리의 방이 둘 있는 비둘기장같이 자그마한 새로 지은 집. 당신이 함흥에서 돌아와 처음에 그 집을 보며 크게 감탄하고 놀라워하시던 모습이 생각난다. 어느덧 오십여 년이 가까운 지금에도 그 광경은 마치 어제런듯 생생했다”. 이 집에 허준과 정근양이 줄기차게 찾아와 돈독하게 우정을 나누던 풍경을 떠올린다. 뒷날 백석의 「허준」이란 인정 어린 시도 이때의 우정이 바탕이 된 것이겠다. 자야 여사 생전에 있던 이 집이 지금은 없다고 하니 미리 보존을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백석의 나타샤가 누구인가에 대해서 말이 많고, 꼭 누구로 특정할 수 없다는 얘기가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만 그래도 한 명을 꼽으라면 자야 여사를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다. 거리를 두고, 체면을 생각해야 하는 사람보다는 이것저것 안 가리고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을 믿고 싶은 것이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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