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 용궁사 / 채영조
한때 이곳에 들러
사랑하는 사람을 얻게 해 달라고
소원을 빌어본 적이 있습니다.
당신께서 폐암으로
보름 동안 앓아 누워계시자
매일 용궁사에 들러
사랑하는 사람 대신
당신을 얻게 해 달라고
무릎이 깨지도록 빌어 보았지만
끝내 이승에서의 인연을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한 가지 소원은 이룬다는
해동 용궁사에 와서
핏줄 하나 구하지 못하고
돌아오는 자정(子正) 경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봐도
인생은 한 조각 구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살아야 한다고 절규하던
마지막 몸부림도
천명을 거역할 수 없었나 봅니다.
-『아름다운 추억들은 찬란한 만큼 슬펐다』, 빛남출판사, 2019.
감상 – 언젠가 기장역에 내려 부산으로 가는 버스를 탄 적이 있다. 승차 후 얼마 안 있어 용궁사를 지나게 되었을 때 잠깐 망설인 기억이 난다. 버스에 내려 한번 둘러보고 싶은 마음이 일었지만 버스는 주저 없이 출발했고 그 이후 용궁사에 갈 기회를 얻지 못했고 지금 용궁사 시를 읽는다.
채영조 시인이 빌었던 “사랑하는 사람”과의 인연은 어찌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빠, 사랑해”라는 「비밀」을 엄마 몰래 전하는 딸을 두고 있다. 사랑의 결실을 간절히 바랐던 시인이지만 어느 순간 더 절실한 문제에 직면한다. 가까운 핏줄이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시인은 " 무릎이 깨지도록” 절을 하며 세상인연이 끝나지 않기를 빌고 또 빈다. 핏줄을 누구로 특정하지 않았지만 “내가 서른이 채 되기도 전에 / 별나라로 가셨”(「소에 대한 기억」)다는 아버지가 연상이 된다.
하나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용궁사 부처도 끝내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고 시인은 인생이란 게 “한 조각 구름”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는다. 시인이 애초에 빌었던 사랑도 그와 같을지 모른다. 『삼국유사』의 조신은 사랑하는 사람을 얻지 못하고 부처를 원망하다가 깜빡 잠이 든다. 꿈속에서 평생을 살면서 그토록 원했던 사랑을 얻지만 생활고로 헤어지는 아픔을 겪으며 꿈을 깬다. 깨고 보니, 사랑도 별 게 아닌 게 된다. 한때의 사랑도, 혈육 간의 애별리고(愛別離苦)도 한바탕 꿈과 같이 덧없는 것이 되고 만다. 그러니 애증에 사로잡히지 말고 집착을 내려두라는 말씀도 좋게 듣지만 문제는 지금의 ‘나’가 엄연한 실존인지 꿈을 깨지 못한 허상인지 가늠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꿈인 듯 현실인 듯 생을 지나면서 혹여, 용궁사에 닿게 되면, 사랑할 수 있는 동안 사랑하고, 욕망할 것을 욕망하고, 버릴 것을 버리는 지혜를 달라고 빌어야겠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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