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부 (凡夫) / 한상호
제 이름 하나 제 손으로
짓지 못하네
평생
결국
- 『꽃이 길을 놓았을까』, 스타북스, 2020.
감상- 시의 제목으로 차용된 ‘범부’란 단어에서 범은 ‘무릇 범’으로 새긴다. 무릇은 대체로 그러하다는 것이니 범부는 세상에 특별할 것 없는 사람, 흔히 장삼이사, 갑남을녀로 칭해지기도 하는 평범한 사람이다. 그런데 김구 선생이 자신의 호에 무릇 범을 쓴 것은 특별해 보인다. 자신의 호를 백범으로 바꾼 이유에 대해서, “하등 사회, 곧 백정(白丁) 범부(凡夫)들이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나 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독립국민이 되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백범 일지』 중)고 했다. 하층민과 연대해서 함께하겠다는 의지는 있으나 애국심에 기대어 호를 정했다는 걸 알 수 있다. 모든 기득권을 부정하고 백정과 범부에 대한 평등의식까지 내비쳤다면 더 멋진 호가 되었을 성싶다.
그럼, 한상호 시인에게 범부는 어떻게 와 닿았을까. 시인은 이번 시집을 대여섯 줄이 넘지 않는 짧은 시로 채웠는데, 이 시에서도 ‘범부’에 대한 인상을 한 문장에 단어 둘을 보태서 던져놓았다. “제 이름 하나 제 손으로 / 짓지 못하네”를 언술 그대로 보면 당연한 말이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 치고 스스로 이름을 짓고 나온 이는 없다. 심지어 사물도 마찬가지다. 다른 누군가의 작명과 호명으로 존재의 이름을 가질 뿐이다.
스스로 이름을 짓지 못한다는 점에서 다들 평등한 위치라고 여길 순간, 시인은 “평생”, “결국”이란 단어로 한 번 더 앞의 문장을 생각하게 만든다. 시작부터 없던 것이 평생 가는 게 범인의 삶이란 건가. 그러고 보니, 이름은 제 이름 세 글자이기도 하지만 평판이나 명예란 의미도 갖고 있다. 결국, 존재의 가치를 충분히 실현하지 못하는 대개의 우리가 범부가 되고 만다. 물론, 헛된 명예욕에 사로잡혀 자아도 잃고 사람도 잃고 그토록 원하던 명예까지 바닥으로 추락시키는 경우를 적잖이 보게 되는 현실이지만, 이 땅에 온 이상 자신으로 인해 조금이라도 세상이 좋아진 흔적, 아니면 최소한 자기가 다녀갔다는 흔적이라도 남겨두지 않으면 허무할 것이란 생각도 든다.
시인이 시를 쓰는 이유도 그러할지 모른다. 자기 삶과 주변의 모든 것에 의미를 발견하고 또 부여하면서 애써 자신을 수양하고 그렇게 해서 얻어진 것을 자신의 생명보다 길게 갈 종이에 남겨두려는 심리가 있지 않을까 싶은 거다. 사실 깨놓고 얘기하면 누구든 세상에 평등하게 오지 않았고 평등하게 살지 못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결국” 범부의 운명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럼에도 유서 대신 백범 일지를 쓰듯 제 이름자를 부끄럽지 않도록 가꾸려는 현재의 노력은 소중해 보인다고 해야겠다. (이동훈)
'감상글(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방가지똥 / 홍해리 (0) | 2020.03.14 |
---|---|
취권 / 신단향 (0) | 2020.03.10 |
아파트 혹은 아프다 / 강동수 (0) | 2020.02.28 |
목발 1 / 나호열 (0) | 2020.02.23 |
포도나무만 모르는 세계 / 배영옥 (0) | 2020.02.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