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취권 / 신단향

톰소여와허크 2020. 3. 10. 00:41




취권 / 신단향

 

 

만취한 여인이 보름밤 대결을 청했다 네온이 하나 둘 꺼지는 어둠 속에서 검을 뽑았다

 

풀싹 폴싹 날아올라 맥주 소주병 불판 연통 유리창들을 베어댄다 베어지는 것들은 모두 그녀의 칼춤에 질식, 비명소리도 없다

 

꼬부라진 혀 뒤틀린 폭언의 독침이 튄다 독침이 정확히 정수리의 사혈로 날아온다 화분의 행운목 둥치가 뽑힌다 선 채 부르르 히야시 물병의 얼음물을 뒤집어쓴다

 

벽 사이 머리를 처박고 사시나무가 되었던 나는 소주를 병째 나발 불고 가운데로 나와 맞선다 이제 고마 해라 엉?’

 

시뻘겋게 달은 불집게를 입에 문 듯 이십이 공탄 최대 화력 소리를 터트린다

 

-『상록마녀, 애지, 2018.

 

 

감상 같은 해 나온 상록객잔을 통해 객잔에 들르는 도심의 고수들과 졸개들을 자유자재로 요리해내는 상록마녀의 신공을 넋 놓고 구경한 적이 있지만, 이번에 나머지 절반의 신공과 검기(劍技, 劍氣)가 담긴 상록마녀편을 얻게 되어 초식 하나라도 익힐 궁리로 이 글을 쓴다.

사실, 상록마녀가 애초부터 고수 대열에 있었던 건 아니다. 목구멍이 포도청(혈겁의 거리)이어서 객잔을 열 수밖에 없었고, 문을 연 이상 어떻게든 객잔의 문전이 무사의 발길로 성시”(마녀론)를 이루게끔 해야 했다. 협객을 자부하는 이들이 안에서도 밖에서도 못 휘두르던 검을 객잔에서는 잘도 뽑는다. 더러 술을 핑계로 주위를 마구 난장질할 것 같으면, 방어와 공격의 기술을 익히지 않고서야 어찌 견딜까. 상록마녀의 절륜한 솜씨는 자칫 문을 닫아야 하는 절박함 속에서 내공이 차곡차곡 쌓여온 결과다. 그 쌓인 내공만큼 내상도 생겼을 거란 짐작도 어렵지 않다.

비겁한 졸개들에겐 열두 폭 치맛자락 휘날리며 뒷발길로 걷어차”(졸개들) 버리고, 협객인 척하는 남자들에겐 독가시를 날려서 가뿐하게 응징하는 상록마녀지만 버거운 상대는 여전히 많다. 대결에서 보듯 관의 힘을 빌린 부정한 세력에 대해선 혼자 대항하지 못하고 거리에 떼로 눕기도 한다. 올지 안 올지 알 수 없는 정의의 상록 검객을 막연히 기다릴 뿐이다.

수시로 마주하게 되는 만취의 객들이 마구잡이식 폭언과 폭력을 행사할 때도 상록마녀는 제 정신에 대응하기 어렵다. 이쪽이 암만 수단을 강구해도 저쪽이 귀를 막고 막무가내일 때는 방법이 없다. 그렇다고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자니 그 후유증이 이쪽과 저쪽을 다 베게 되니 뒷감당도 두렵다. 마침내 상록마녀는 필살기를 펼치기로 한다. 취권이다. 영화 속, 소화자 영감으로부터 성룡에게 이어진 권법이지만 상대보다 자신을 망가뜨릴 위험이 많아서 인지 요즘은 시전되지 않는 기술이다.

취기를 불사하며 상록마녀의 온몸에서 끌어 모은 최대 화력 소리는 상대의 기를 꺾었을 게 분명하다. 성룡이 팔다리 놀리며 고생해서 구사하는 기술보다 윗길이다. 다만, 병째 나발 분 소주가 상록마녀의 속을 긁어대고 쓰리게 할 것이니 취권을 쓸 기회가 없기를 바랄 뿐이다. 상록마녀가 객잔에서 아직 현역으로 있는지 알지 못하나 상록마녀의 분신인 시인은 놀라운 필력으로 시의 지경(地境)을 절묘한 데까지 넓히고 있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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