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능파각(凌波閣) 교주(校註) / 임보

톰소여와허크 2020. 6. 25. 00:08

능파각(凌波閣) 교주(校註) / 임보

 

 

다음은 연전에 내가 쓴 능파각이란 4단시다.

 

개울 위에 다락을 세웠으니 누각(樓閣)이요

개울 위에 다리를 놓았으니 교량(橋梁)이요

개울 위에 절문을 얹었으니 산문(山門)이다

동리산(桐裏山) 계곡 물 위에 뜬 봉황의 집

 

그리고 작품의 끝에 아래와 같은 주()를 붙였다.

 

* 능파각은 곡성 태안사(泰安寺) 입구에 세워진 누각.

개울물 위에 세워져서 능파각이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흐르는 개울 위에 세운

()이면서 다리[]이면서 또한 집[樓閣]

()’건넌다는 뜻이 아닌가!

그러니 능파(凌波)’라는 이름은

개울물을 건넌다는 뜻이겠거니 하고

개울물 위에 세워져서 능파각이라고 했다

내 멋대로 주를 달았던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능파라는 말이 물을 건넌다는 뜻이 아니라

미인의 가볍고 우아한 발걸음을 형용하는 말임을

뒤늦게야 알았다.

이를 어찌한단 말인가!

이미 내 글은 활자화 되어 세상에 떠돌고 있는데

 

세상을 어지럽힌 죄 어떻게 돌이킬 길 없어

여기 능파각 교주를 써서 부끄러움을 덜고자 한다.

 

-청산무, , 2020.

 

 

감상 : 시인이 찾은 능파각은 곡성 태안사에 있다. 4단시에서 보듯 중간에 계곡물을 두고 이쪽과 저쪽을 이어주니 능파교(교량), 그 위에 지붕을 두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능파각(누각)이다. , 절의 바깥문 역할을 겸하니 산문이라고 해도 그만이다.

문제는 능파(凌波)의 의미이겠는데, 시인은 개울물을 건넌다는 뜻으로 이해하고 시를 썼는데 원래 의미는 그것이 아니란 걸 뒤늦게 알고 그 수습책이란 게 또 한 편의 시가 된 것이다. 시인은 아마도, 위나라 조식의 낙신부(洛神賦)의 한 구절인 능파미보(凌波微步-물결 위를 사뿐히 걷는 모습)’를 염두에 둔 걸로 보인다. 왕권을 다투던 조비, 그의 아내인 견 황후를 조식이 사모해서 쓴 시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절집에서 아름다운 여인의 자태를 누각이나 교량 이름으로 구태여 가져왔을까 하는 의문은 남는다. 고성 건봉사에도 무지개 모양의 능파교가 있다. 세파를 헤치고 극락세계로 건너가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데 이도 그럴듯하게 들린다.

건봉사 능파교는 돌을 정교하게 다듬어 쌓은 아치형 다리다. 이름만 같았을 뿐 나무로 된 태안사의 그것과는 확연히 구별이 된다. 그런 중에도 두 다리가 아름다움을 주는 건 다르지 않다. 개울물을 건너는 능파도 좋고, 험한 세상 건너서 더 좋은 세상 가는 능파도 괜찮다. 보기에 아름다워서 능파라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이 시의 맛도 그렇다. 새로운 깨달음으로 이전의 앎을 바로잡는다고 했으나 시인이 거기에 특별히 집착하거나 심각해하는 거 같지 않다. 오히려 부리는 언어엔 장난기도 있다. 이전의 이야기에 새로운 이야기를 입히며 재미를 주는 방편으로 시인의 전매특허인 엄살과 흥을 내보이는 것일 테다.(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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