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비통한 그림 / 이동순
그렇게 앓는 몸으로
수만리 먼 길 떠난다는 게
처음부터 무리였다
온몸에 홍역 번져
울긋불긋 열꽃이 만발하던
세 살배기 삼대독자 표도르가 죽었다
마지막은 할배 품에서
가쁜 숨 몰아쉬다가 축 늘어졌다
눈가엔 눈물 맺혔다
한 가문의 대가 끊어진 시간
무정한 이주열차는 쉼 없이 달리고
할배는 죽은 손자 이틀이나 껴안고 있었다
차가 벌판에 잠시 섰을 때
할미는 할배 품에서 손자 빼내어
철둑 가 눈밭에 묻었다
『강제이주열차』, 창비, 2019.
감상 : 옛 발해 영토이기도 한 러시아 연해주는 조선 유민들이 대거 이주해서 마을을 이루고 살던 곳이다. 상해임시정부보다 앞서 임시정부를 만들기도 했던 항일 독립운동의 거점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최재형, 이상설, 안중근, 홍범도 등이 이곳에서 활동했다. 이동순 시인은 홍범도에 대해선 따로 대서사시를 남긴 바 있다.
그런데 국경을 두고 일본과 다툼이 치열했던 러시아 스탈린 정부는 연해주 고려인(한인)들이 일본을 돕는다든지 구별이 안 된다든지 하는 핑계를 대며 중앙아시아 쪽으로 강제이주를 시킨다. 독립 영웅인 홍범도도 강제이주를 피할 수 없었고, 러시아 혁명 당원인 조명희 작가까지 숙청해가며 밀어붙인 폭거였다. 시인은 “연해주 이십만 고려인들 / 하루아침에 / 살던 곳 모두 빼앗기고 뿌리도 뽑힌 채 / 이주열차에 실려 개처럼 짐승처럼 끌려갔지”(「고려인」)라며 1937년, 당시의 참담한 상황을 증언한다.
이주 통보를 받던 일로부터 역에 모여 열차를 타고 나서던 장면, 그리고 이동하는 기차 안으로 시선을 옮겨가며 시인은 “아, 우리는 지금 어디를 이렇게 / 숨 가삐 끌려가고 있는가”(「그날의 실루엣」)라며 당시 고려인들의 황당하고 비참했을 심정을 헤아려본다. 바람막이도 되지 않는 판자를 대고 똥오줌도 처리할 수 없는 열차 안에서의 생활은 더욱 끔찍했다. 잠시 정차할 때 참았던 소변을 위해 여인들이 달려간 갈대밭을 군인들이 탈주로 착각하고 따발총을 갈겨버리고 없던 일처럼 떠났다는 「깔밭의 참변」은 믿기 어려워 한동안 책을 넘기기 어렵다.
숱한 사연 중에 시인이 「가장 비통한 그림」으로 제목을 뽑은 시를 읽어본다. 열차 안에서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고 죽은 손자의 시신을 이틀이나 안고 있었다는 할배, 그 시신을 겨우 받아서 “철둑 가 눈밭에 묻었다”는 할매의 이야기를 시인은 애써 덤덤하게 전했지만 그 마음은 제목 그대로였을 것이다.
무정한 이주열차는 쉼 없이 달린다고 했지만 시집은 결코 무정할 수 없는 사연들로 채워져 있다. 멈춰서 돌아보고 환기함으로써 반성할 사람이 반성하고, 위로받을 사람이 위로받으면 좋겠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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