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숙희 『내방가사 이야기』, 달구북, 2019.
조선시대 한글문학으로 짧은 시에 해당하는 것이 시조라면, 긴 시에 해당하는 게 가사 문학이란 생각이 든다. 시조의 양식을 살리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좀 더 하기 위해 시조 중장을 길게 늘여서 쓴 사설시조도 있다.
시조와 가사는 네 마디 반복인 4음보로 운율감을 주며, 작자층이 주로 남성 양반이란 공통점이 있다. 권숙희 시인이 이번에 선보인 『내방가사 이야기』는 제목에서 보듯 여성들에 의해서 쓰인 작품이다. 책을 읽으며 세 번 정도 놀랐는데, 전문 혹은 일부가 소개된 내방가사의 양이 결코 적잖은 데 놀랐고(지금도 두루마기 형태로 가정에 보관되어 읽기를 기다리는 작품이 상당하다는 얘기도 들은 듯하다), 그 작품의 정서적 울림이 크다는 데 놀랐고, 시인이 속한 ‘내방가사문학회’의 활동 등 현대에도 꾸준하게 창작되고 있다는 데 또한 놀라게 된다. god의 <어머님께>, 방탄소년단의 <봄날>등 K-POP의 노랫말이 가사 운율을 그대로 쓰고 있다는 말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실제, K-POP뿐만 아니라 우리 가요의 노랫말 자체가 그런 음보율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음을 짐작하고 있어서다.
작자 미상의 <시집살이가>, <베틀가>, <바늘가> 등 부녀자의 애환이 내방가사의 소재가 됨을 일부 인용한 가운데 <덴동어미 화전가>가 유난히 가사 내용이 어두운데, “첫째 낭군은 그네에 죽고 / 둘째 낭군은 괴질에 죽고 / 셋째 낭군은 물에 죽고 / 넷째 낭군은 불에 죽어 / 이내 한번 못 잘 살고 내 신명이 그만일세”란 사연이 있어서다. 하지만 화전놀이 자체가 어둡기만 하겠는가. 시인은 지난 시절 벗들과 다정한 시간을 떠올리고 다음을 기약하며, “모이는 날 되거들랑 번개같이 달려오소 / 이 꽃 저 꽃 곱다 한들 ‘벚꽃’만큼 곱겠는가 / 맘속에 핀 ‘벚꽃’이야 세월 간들 시들겠나”(권숙희, <화전가>중)며 벚과의 한때가 ‘벚꽃’임을 함의하며 추억을 현재화시켜 놓는다.
“그립다 이 아해야 선연한 네 얼굴은 / 두 눈에 삼삼하고 옥 같은 네 목소리 / 두 귀에 쟁쟁하여 실성지인 되겠구나”(김우락, <조선별서>중)는 할머니가 손녀에게 보낸 가사이고, “썩은 고목 저 둥치야 너와 나와 일반이나 / 너는 썩어 자빠지면 고향 사람 치우련만 / 이내 몸 엎어지면 고향 사람 누가 볼꼬”(김씨 부인 <눈물 뿌린 이별가>중)는 망국의 현실에 실망하고 애국하러 간도로 떠나면서 남긴 가사다. “오호통재 오호애재 이 손녀 출가하여 / 오고 가고 하올 적에 잘 오너라 잘 자거라 / 남다르게 반겨 맞던 그 음성이 귀에 쟁쟁”(이만식, <조모님 탈상 제문>중)은 손녀 입장에서 돌아가신 할머니께 부치는 제문이다.
이런 작품들을 인용하며 권숙희 시인은 “목숨을 다 바쳐도 남은 기록 없으면 / 후세에 사람들은 그 공로를 모른다네 / 김우락 종부님과 허은 종부님은 / 자신이 겪은 일을 내방가사 남기시어 / 후세이 전하시니 감사한 일이지요”(권숙희, <독립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은 종부 두 분>중)라며 기록의 중요성을 언급하며, 근래에 창작되고 발표된 내방가사도 소개해 준다.
남성들이 놓친 부분을 파고들어 문학의 장을 넓힌 내방가사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도 추진 중인 시인은 새로운 대화체 형태의 현대가사를 시도해서 말미에 붙여두었다. 1900년 대구 사문진 나루터로 피아노를 처음 들여왔을 때를 배경으로 해서, <귀신통 이야기>를 쓴 것인데 술술 잘 읽힌다. 이런 노력과 시도가 책으로 결실하고 세종도서로 선정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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