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주 반 되 / 박성우
상가(喪家)에서 고향 친구들을 만났다
어색하고 무거웠던 그 자리가
어둠에 조금씩 밀려갈 무렵
나는 취기가 오른 얼굴로
옛날 얘기들을 몇 개 꺼냈다
고향마을에서 조그만 구멍가게를
하셨던 어머니 얘기
그때 만들었다는 외상장부 얘기
내가 40년도 더 된 그 장부를
아직 갖고 있다는 얘기까지……
그날 우리는 그 장부가 있다 없다로
큰 내기를 하나 했다
나는 잊고 지냈던 그 장부를 밤새 찾았다
장부는 몇 번의 이사에도 어디 가지 않고
책장 안쪽 가장 깊은 곳에 잠들어 있었다
설 선생 진로 1병
지동댁 연탄 숯 1봉
옥산댁 달걀 5개
아무 생각 없이 장부를 읽어 내려가다
나는 그만 눈물이 핑 돌았다
어느 낯익은 이름 옆에 친구의 이름과
탁주 반 되가 나란히 적혀 있었다 그건
어린 친구가 아버지를 위하여
탁주 심부름을 했다는 것이 아닌가
하루 일을 끝내신 아버님은
지친 하루를 탁주 반 되로 씻었을 것이다
친구는 또 기다리는 아버지를 위하여 연기
자욱한 고샅을 종종걸음으로 달렸을 것이다
그렇게 고만고만했던 우리네 살림살이들이
으스름 달빛 아래 하나둘 쏟아지는데 나는
다시 그 장부를 책장 깊은 곳에 넣으며 우리가
벌써 그때의 어른들을 지나간다는 것과 어느 날
이 장부를 천천히 넘길 친구의 쓸쓸함을 생각하였다
-『누항사』, 불교문예, 2020.
감상- 박성우 시인이 자란 고향 마을은 창녕 우포다. 자연 생태가 잘 보존되어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이지만 그곳 주민들의 삶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해 보인다. 아버지 세대는 고향에 남아있는 경우가 적잖았겠지만 그들의 2세는 밥벌이를 찾아서 도심으로 나가서 또 고만고만하게 살아갈 것이다. 이 시집 『누항사』는 말 그대로 누항의 거리에 살아가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시인이 부처나 맹자의 인생론을 빌려올 때도 시의 주인공은 가족과 이웃이다. 「탁주 반 되」에서 보듯 고단한 일상을 말하는 중에도 다습고 잔잔한 정이 깊이 스며있다.
빈천지교 불가망(貧賤之交 不可忘)이란 말이 생각난다. 가난할 때의 사귐은 잊어서 안 된다는 것인데, 친구의 가계와 비밀이 적힌 어머니의 외상 장부를 통해서 시인은 이를 실천한다. 외상 장부에 적힌 ‘탁주 반 되’와 그 옆에 나란히 적힌 친구 이름을 발견했으니 시인은 내기 술을 받을 자격이 생겼다. 친구한테 외상 장부를 확인시켜 줄 요량이지만 시인은 “장부를 천천히 넘길 친구의 쓸쓸함”에 생각이 미친다. 아마도 상을 당한 친구처럼 술심부름을 시키던 친구의 아버지도 이미 세상을 떴을 것이다. 시인은 서시 격인 「공가의 분자론」)에서 “무엇을 나눌 때 / 나누다 나누다 더는 나눌 수 없으면 / 그게 분자라고 우리는 배웠다”고 하더니 그 배움대로 슬픔과 근심을 나누고 나누어 마침내 편안해지는 경지까지 이르렀다는 인상을 준다.
외상 장부에 적힌 달걀 5개가 한 판보다 풍성해 보이고, 탁주 반 되가 한 되보다 인정스레 보이는 건 가난마저 나누려는 누항에서만 있는 일일 것이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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