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책)

<에세이> 차 한 잔의 시상

톰소여와허크 2021. 3. 27. 21:38

모윤숙 외, 차 한 잔의 시상(詩想), 태창, 1978.

 

 

- 시인 16명이 쓴 시가 있는 산문집이다. 제일 앞장은 1910년생 모윤숙 시인이다. 모윤숙은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1951)로 널리 알려졌지만, 학도병 참전을 독려했던 친일 경력을 비판받고 있다. 생사를 오가는 시대의 부침이 모윤숙의 삶을 관통했으나 선택에 따른 명과 암은 자신의 몫으로 남아있다. 고향 마을 원산항의 명사십리를 두고 가고 싶어도 가고 싶어도 못 가는 명사십리, 그 물이 왜 이리도 모질게 내 클클한 가슴을 잡아당기고 있을까? 마음은 구름을 탄다고 말하는 모윤숙의 감성은 아주 서정적이다. 원산항 가는 길을 마저 옮기면, “서울을 지나 옛날 그때처럼 청량리를 통과하는 경원선을 지난다. 삼방, 검불랑, 석왕사를 지나면 파란 비취 물결이 흰 거품을 내뿜는 원산항이란다. 이렇게 간단한데 현재까지 칠십 년 동안 꽁꽁 막힌 길이다.

모윤숙의 뒤를 잇는 구상 시인도 고향이 원산이다. 김종문의 고향은 평양으로 기록되어 있다. 김종문은 하늘을 나는 꿈이 창작에 도움 됨을 말한다. 꿈이 정지되어 있다면 술이라는 에너지로 발동이 걸리게 할 수 있다고 하니 술 좋아하는 것은 동생 김종삼과 다르지 않다.

홍윤숙과 몇몇 시인은 이름이 낯설다. 홍윤숙 시인의 고향은 정주다. 홍윤숙이 태어난 1925년은 정주 오산학교 출신 김소월이 시집 진달래꽃을 발간한 해다, 백석은 1924년에 오산학교에 입학해서 소월을 가르치던 조만식과 김억의 지도를 받는다.

홍윤숙은 로마와 파리 등에서 체류했던 경험을 소개하고 있다. 성 바오로 문을 지나 외인 묘지에 이르렀을 땐, “영국의 시인 셀리가 아직 삼십 세의 젊은 나이로 로마를 사랑하여 살다가 바다에서 익사했고, 그 넋이 이국의 땅에 외로이 묻혀 잠들어 있는 앞에 봉선화는 코즈모폴리턴 같은 허허로운 자태로 연약한 꽃잎을 저녁 바람에 하느작거리며 하염없이 서 있는 것이다. 마치 그 모습이 멀리 시집온 고향집 언덕을 향해 멀고 먼 눈길을 쏟고 있는 여자처럼 서글퍼 도무지 발길을 돌릴 수가 없었다고 적어두었다.

홍윤숙은 봉선화를 코즈모폴리턴(세계주의자)에 빗대고 고향을 그리는 여인과 연결 지었다. 사실, 모윤숙도 구상도, 김종문도, 홍윤숙도 또 그밖에 북쪽에서 넘어온 사람들도 코즈모폴리턴이라기보다는 전쟁으로 고향을 잃은 디아스포라에 더 가깝다.

박재삼 시인은 고향이 삼천포로 알려져 있지만 이 책에선 고향이 일본 도쿄로 표시되어 있다. 누구든 비밀 하나를 열면 디아스포라가 되는 걸까. ‘비밀 하나도 없는 것은 재산 없는 것처럼 가난하다는 소설가 이상의 말을 비틀어서 박재삼은 비밀이 들어갈 자리에 눈물로 대치시켜 볼 것을 주문한다. 눈물은 필요할 때 요긴하게 부를 값이더라도 차 한 잔에 를 가까이 뒤적여보는 게 생활이면 좋을 것이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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