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밤의 미장센 / 배세복

톰소여와허크 2021. 6. 20. 12:07

 

밤의 미장센 / 배세복

 

벤치에 털썩 주저앉은 배경의 사내가

 

마른세수를 하는 척 멈춘 손과 얼굴의 병치가

 

밤에서 새벽으로 넘어가는 쪽으로 부는 바람의 행방이

 

남아 있는 꽃잎을 듬성듬성 날리는 벚나무 옆 흐린 가등이

 

익숙한 풍경이라는 듯 시치미 떼는 봄밤의 습속이

 

벤치 위 무릎으로 고개 묻게 만드는 두 다리의 위작이

 

서서히 고조되며 들썩이는 체크 셔츠의 진동이

 

따라갈 수 없는 곳으로 떠난 사람을 꺼내지 않으려는 흐느낌이

 

그럼에도 조금씩 들켜버리고 마는 속울음 사이사이 호명이

 

차라리 암전 속으로 사라지고 싶은 암묵의 사내가, 내가

 

- 『목화밭 목화밭, 달아실, 2021.

 

 

감상 미장센이란 말은 무대 위 등장인물의 배치나 역할, 무대 장치, 조명 따위에 관한 총체적인 계획이라고 하니 감독이나 예술가의 개성이나 의도가 강하게 반영되어 있을 것이다. 배세복 시인이 의도한 밤의 미장센에서 고흐의 그림 하나가 스쳐간다.

<슬픔에 빠진 노인 Sorrowing old man>(1890)으로 알려져 있는 고흐 그림엔 영원의 문(At Eternity's Gate)’이란 부제가 붙어 있다. 고뇌에 빠진 사내의 모습 그 뒤에 영원의 집이 있을 것이란 고흐의 편지 내용을 참고한 제목으로 보인다.

고흐 그림은 의자에 앉은 노인이 고개를 숙인 채 두 주먹에 얼굴을 묻고 괴로워하는 모습이다. 자그마한 난롯불만 있을 뿐 마룻바닥과 벽 외엔 어떤 소품도 없고 흐느끼는 듯한 노인 모습만 전경으로 확대되는 느낌을 준다.

시인의 그림은 실내 인물을 실외로 옮겨놓으며 주변 상황을 좀 더 정교하게 짠다. 가등 조명으로 벚꽃잎이 떨어지는 장면은 봄밤의 그럴듯한 서정까지 불러일으킨다. 배경 속 사내의 고뇌와 슬픔은 고흐 그림 속 사내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여도 옷이 들썩일 정도로 현실적이다. 시인은 슬픔의 이유도 숨기지 않는다.

이 세상 영원한 것이 없다고 하니 슬픔도 그러할 것이다. 다들 암전으로 가는 막간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걸 깨닫는다고 해서 현재의 고뇌, 현재의 슬픔이 덜어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더 고뇌하고 슬퍼하는 것이 인간적인 행위라는 생각도 든다. 누구는 그림으로 누구는 시로 고뇌의 한 순간, 슬픔의 한 장면을 유감없이 드러내는 걸로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것일 테다. 지극한 슬픔의 끝이 평화와 영원에 닿아 있기를 바랄 뿐이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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