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책)

<에세이> 랩걸

톰소여와허크 2021. 10. 30. 08:35

호프 자런(김희정), 랩걸 Lab Girl, 알마 출판사, 2017.

 

 

- 랩걸은 식물 이야기, 식물 연구를 바탕으로 새로운 앎을 얻는 과학 이야기, 식물과 과학을 공부하는 과정에 겪었던 사적인 경험이나 인간 이해에 관한 이야기를 겸한 책이다. 제목의 랩(Lab)은 실험실(laboratory)을 의미한다는데 노동당의 약자이기도 하다. 저자의 정치색은 알 수 없으나 나무와 숲이 망가지는 걸 걱정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녹색당이 우선 떠오른다.

저자의 고향은 겨울이 긴 미네소타다. 유년을 떠올릴 때 과학자인 아버지의 실험실, 정원을 가꾸는 어머니와 함께 제제의 라임오렌지나무와도 같은 은청가문비나무를 생각한다. 저자는 고향을 떠나서 과학자로 살면서 나무가 살아있는 생명체란 것을 완전히 이해할 때 즈음 나무의 부고를 접하고 만다. 과학은 한때 벌어졌거나 존재했지만 이제 존재하지 않는 모든 중요한 것을 주의 깊게 적어두는 것이야말로 망각에 대한 유일한 방어라는 것도 가르쳐 주었다고 하더니, 저자는 과학 연구로 바쁜 중에도 은청가문비나무를, 또 자신의 이야기를 적어두는 데도 부지런하다. 책 표지는 겨우 겨울을 난다는 참나무겨우살이 세밀화인데 책과 연관성을 고려하면 은청가문비나무가 좋았을 것이다.

저자는 과학 연구 동업자이면서 영혼의 동반자이기도 한 빌과의 대화에서 자신이 책벌레임을 숨기지 않는다. 어떤 책을 읽었는지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는 편이긴 하지만 장 주네 이야기엔 흥을 낸다. 장 주네는 글쓰기를 따로 배우지 않았기에 독창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는 걸 강조하고 싶어한다. 식물 이야기이면서 식물 이야기만은 아니고, 과학 이야기이면서 과학 이야기도 아니고, 신변잡기적 이야기이면서도 꼭 그런 것도 아닌, 기존의 틀에서 자유로운 저자의 글쓰기도 장 주네의 개성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실험과 연구에 임하는 저자의 정성도 지극하다. 토질 현장 탐사를 갔을 때 텐트를 치고 거두는 시간을 낭비하기 싫어서 차에서 잠을 자더라는 동료 교수의 말 그대로였을 것이다. 연구 초기의 저자는 팽나무씨에 오팔이 든 것을 처음 발견하고, 오팔이 형성되는 조건에 영향을 주는 온도를 파악하고, 또 그 다음을 생각하고 연구를 진행했지만 그 해 팽나무는 저자의 기대를 배신한다. 저자는 실망감 끝에 자신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나무의 입장에서 즉, 나무가 하고 싶은 일은 뭔지, 하고 싶지 않은 일은 뭔지 아는 게 필요하다는 인식의 전환을 가져왔고 그게 자신의 첫 이파리였다고, 모든 대담한 씨앗들이 그렇게 상황을 헤쳐가는 거라고 부언한다.

궁금증이 많은 저자는 어머니가 되었고, 개밀 주스를 먹고 호랑이로 변신하기를 기다리는 아이에게 자기가 원래 되어야 하는 것이 되는 데는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린단다고 말한다. 저자가 자신이 꿈꾸던 대로 이런 이야기들을 전하게 된 것도 그냥 이루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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