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책)

<여행 산문> 지금 바다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을까

톰소여와허크 2021. 12. 12. 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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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실, 지금 바다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을까, 학이사, 2021.

 

 

-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ebs 한국기행은 종종 보는 편이다. 방영분을 보고 짬을 내어 찾아가는 경우도 있다. 지리산 칠암자를 다룬 방송을 보고 영원사, 상무주암 등을 둘러보았으나 정작 가고 싶었던 도솔암은 길을 찾지 못한 데다 곰을 조심하라는 플래카드에 겁박당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몇 년이 더 지나고서야 어렵게 도솔암을 찾았을 땐 반가운 마음과 함께 그 사이 약간의 변화를 감지하고 실망스러운 마음도 얼마간 있었다.

이처럼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상의 영상을 보고 여행 동력이 생기고 실제 움직이기도 하지만 더 많은 경우엔 책이나 글에서 자극을 받아 저기 저쪽을 가봤으면 하는 마음이 생긴다. 별말 없이 , 거기 좋더라!” 정도의 말만 들어도 설렐 때도 있다. 작가 역시, 진평왕릉을 처음 접하는 지인의 말로 그곳 인상을 마무리할 때, 말인즉 이 분위기 좀 봐, 좀 좋아. 만약 내가 진평왕릉을 가보지 않았다면 다음 행선지로 진평왕릉을 우선 꼽았을 것이다.

주말을 기다리고, 휴가를 기다리고, 먼 데 눈을 주는 것은 자연의 품과 바깥공기에 대한 그리움, 여행에 대한 막연한 향수가 바탕에 깔려 있어서 그럴 거도 같다. 내가 아는 최영실 작가도 길에서 좀 더 자유로워지는 듯하다. 이번 여행 산문집 곳곳에서 그런 흔적을 만난다. 작가는 여행 자체를 즐긴다는 인상을 주는데 낯선 곳에서 접하는 풍물이나 사람살이에 관심을 갖고 거기에 인문적 감수성을 더해 문장으로 풀어내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경주 장항사지를 만났을 때는 첫 만남이라 더 두근거리는 이곳, 바로 경주 장항리 서 오층석탑이다. 언젠가 사진에서 한눈에 반해 언젠가는, 언젠가는, 하며 아껴둔 참이었다. 아니 다녀온 뒤로도 감추어둘까 잠시 고민했던 곳이란다. 문장에 설렘과 흥분이 느껴지지만 이어지는 작가의 여행 이야기는 별나게 야단스럽거나 흥분을 자아내는 쪽과는 거리가 멀다. 여행 기분을 한껏 내게 하면서도 내면의 평화로움을 깨지 않는다고나 할까. 장항사지 가는 길에 짐 진 노인을 발견한 작가는 노인을 차에 태워드릴까 생각하다가 그 고요하고 평화로운 질서를 깨는 게 실례가 될까 봐 천천히 지나고 마는 감성을 갖고 있다.

작가는 이번 생을 살면서 과거의 사람과 이야기를 잘도 불러오고, 때로 내세의 인연까지 짚어보지만 중심은 현재의 인연이다. 작가는 강원도 평창 대관령에 사는 벗을 찾아서 함께 산책하는 기쁨에 대해 말한다. 혼자 걷고 혼자 결정하는 일에 익숙했지만 함께 걷고 함께 호흡하면서 그 동행의 힘으로 쓸쓸하기 그지없는 이 가을에 나는 씩씩하고 다정해지고 있다고 남에게도 스스로에게도 기분 좋은 고백을 남기는 것이다.

그간 한국기행 애청자로 해외 여행기엔 별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인연의 무게를 생각하며 작가의 뒤를 좇다가 일본 시라카와고에서 함박눈을 맞는다. 이곳에서 작가는 지구 여행자로서의 마음가짐을 이렇듯 선명하게 노래한다. “불편을 외면하지 않고 함께 궁리해 보는 것, 잃어버린 것들을 지킬 수 있도록 연대하는 것, 내가 남기는 발자국이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것, 길 위의 사람을 감싸 안는 것들이 바로 그것이다. 아름다운 고장이, 아름다운 사람이 내일에도 아름다울 수 있으려면 작가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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