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오스터(김경식 역),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1995), 열린책들, 2001.
- 폴 오스터가 뉴욕 타임스의 청탁을 받고 신문에 기고한 크리스마스 관련 단편소설이다. 그 청탁을 고민하는 과정이 소설의 일부로 녹아 있다. 담뱃가게에서 알고 지내던 오기 렌이 그런 고민에 답하듯 자신의 잊지 못할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얘길 들려준다. 담뱃가게에 들른 청년이 물건을 도둑질해가다가 흘린 지갑이 단서가 되어 오기가 청년의 눈먼 할머니와 함께 보내는 크리스마스 이야기다.
짧은 단편이지만, 영화감독 웨인 왕은 이 신문 소설을 읽고 폴 오스터를 찾아오게 되고 결국, 소설을 영화화하기에 이른다. 영화 제목은 <스모크>(1995)다. 출판사에서 번역된 책엔 소설과 관련 시나리오 2편과 그 집필 과정까지 합본되어 있지만 오리지널은 단편소설이다.
소설 속 폴은 글을 쓰는 사람으로, 오기는 가게 주인이면서 동시에 사진사로 등장한다. 사진이란 게 매일 아침 같은 장소에서 같은 구도로 한 장씩 찍은 것인데 처음에 의아해하다가 폴은 오기를 이렇게 인정한다. “세상의 어느 작은 모퉁이에서 자신을 심고 자신이 선택한 자신만의 공간을 지킴으로써 그 모퉁이를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 일을 해내고 있었다”고.
영화는 4천 장을 헤아리는 사진 중에 거리에 걷고 있는 여자에 주목한다. 그 여자가 폴의 아내란 설정을 더하고, 상심한 폴을 구하게 되는 소년과 그 가족사까지 더해지는 이야기인데 원작에 비해서 어떨지 궁금하긴 하다.
폴 오스터의 사무실이 있었던 곳, 웨인 왕이 폴 오스터를 만나러 왔던 곳, 소설 속 오기 렌이 지키는 담뱃가게가 있는 곳은 모두 뉴욕 브루클린이다. 브루클린은 폴 오스터의 『달의 궁전』에도 언급된 곳이다. ‘달의 궁전’이란 매력적인 상호는 주인공이 목격한 브로드웨이의 음식점 간판 네온사인이다. 또한 몇몇 상징적인 장면이 소설 제목에 영감을 불어넣는다. 주인공에게 일자리를 준 노인이 미술관을 찾아가서 랄프 알버트 블레이크록의 작품을 어떻게 감상해야 할 것인지 주문하는 대목이 길게 나오는데, 그 그림이 전시 보관중인 장소가 브루클린 미술관이다.
달빛이 있는 정경을 노인의 주문대로 시간을 들여 가까이 또 뒤로 물러서서 그림을 보며, “블레이크록은 미국의 목가적인 풍경, 백인들이 와서 파괴를 하기 전에 인디언들이 살았던 세계를 그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정신병동에서 생을 마감한 블레이크록의 불행한 삶을 떠올리며 그림의 달을 두고, “그 달은 캔버스에 뚫린 구멍, 다른 세상을 내다보는 하얀 구멍이 되었다. 그것은 어쩌면 블레이크록의 눈일 수도 있었다. 이제 더 이상 거기에 있지 않은 것을 내려다보며 우주에 떠 있는 텅 빈 원”이라고도 했다.
브루클린이란 도시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이란 전무한 편이지만 소설 내용을 통해 그 도시를 조금 안 듯한 착각에 빠지는 것도 소설의 재미라면 재미다. 폴 오스터가 자신이 있던 지역과 공간을 소설로 잘 형상화한 덕에 브루클린은 실제보다 더 매력적인 도시가 되는 것일 테다.
영화 <스모크>는 뒤로 미루어둔다. 브루클린에 갈 일은 뒤에도 없을 거 같긴 하지만 블레이크록의 그림을 검색해서 이전과 다른 눈으로 새로 보게 되는 것도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해두자.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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