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장끼를 쏘다 / 정형무

톰소여와허크 2022. 4. 7. 20:45

장끼를 쏘다 / 정형무

 

 

어느 봄날

홀로 활 쏘다

장끼 한 마리 날아들어

문득 그를 겨냥하였다

 

오방색 아리따움을 향한 화살은

무겁* 언저리에 꽂히고 말았는데

죽음을 면한 꽁지깃들이

산당화 그늘 아래 헌사로웠다

 

두 번째 살을 먹이다 말고

나는 외면하고 그는 두리번거려

불안이 서로를 관통하였는데

빗나가는 게 때로는 잘 된 일

자칫 피를 보았을 것이다

 

가만히 활을 접으며 한숨 쉬기를

쏜 살의 달음질도 내빼던 날갯짓도

시속 십만칠천 킬로미터로 움직이는 지구

구물거리는 생명들 위로 쏟아지는 별똥별처럼

가없는 엔트로피*만 더해가는

헛된 몸짓일 테니

 

 

* 무겁: 활터 과녁 뒤 흙으로 둘러싸인 곳

 

-닭의장풀은 남보라 물봉선은 붉은보라, 우리시움, 2021.

 

감상 엔트로피가 트로피 종류인가 싶기도 할 텐데, 시인이 달아놓은 주에 따르면, “자연 물질이 변형되어 다시 원래의 상태로 환원될 수 없게 되는 현상에 대한 정의란다. 고립계에선 엔트로피가 감소하는 법이 없고 무질서를 향해 간다고 하니 지구를 고립계로 간주하는 쪽에선 종말에 대한 걱정이 있는 모양이다.

시인이 언급한 엔트로피란 단어에선 생경한 느낌을 받지만 장끼를 쏘다란 제목에선 기시감이 없지 않은데 삼국유사에 실린 거문고 갑(상자)을 쏘다가 기억에서 건져진다. 노인이 왕에게 건넨 편지를 열어보면 둘이 죽고, 안 열어 보면 하나가 죽는다는데 왕은 편지를 열어 보고 편지 내용대로 거문고 갑을 활로 쏘게 된다. 결과적으로 왕은 살고, 왕의 여자와 그의 정부(情夫)가 비명횡사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거문고 갑을 명중한 사수와 다르게 시인은 목표물인 장끼를 적중시키지 못하고 산당화보다 더 화사하게 꽁지깃을 편 생명을 보게 된다. 서로 간에 팽팽한 불안이 지난 후에 시인은 화살이 빗나간 것에 안도한다. 시인의 말마따나 빗나가는 게 때로는 잘 된 일로 귀결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결과에 대해 긍정적으로 인식하려는 기제가 작용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실제 인생의 묘가 그러한 것도 같다. 그르친 일이 좋은 일이 되어버린 걸 금방 알아차리고 안도하기도 하겠지만, 긴 시간이 흐른 후에 생을 복기하는 과정에 떠올려지는 장면도 있을 것이다.

인생이 이러하니 화살을 쏘거나 쏘지 않거나, 대상을 맞히거나 맞히지 못하거나 어느 쪽이든 행과 불행을 쉽게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일 수도 있다. 시인은 결국, 엔트로피란 용어까지 빌려 모든 게 헛된 몸짓이라고 했다. 세상 변화를 읽는 인식의 깊이와 함께 시인의 현재 마음도 엿보게 된다. 시인의 이번 시집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글썽이는 마음을 모아놓은 것이다.

거문고 갑의 남녀는 이별 모르고 죽었고, 장끼는 누군가의 빗나간 화살로 까투리에게 구애할 기회를 얻었다. 또 누군가는 이별을 견디고 있다. 어떤 끝이든 그 끝을 미리 당겨 쓸 수 없으니 순간순간을 그저 또 열심히 살 뿐이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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