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들강 / 김황흠
강에 머물러 바라보는 날이 많다
딴 때 같으면 고추 마무리로 고양이 손도 아쉬울 판
하우스가 물에 잠겨 일이 사라지고
나락을 베고 난 뒤 완전 백수
늘 그렇게 흐르고 흐를 뿐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지 못해 싱거운
너나 보자고 매번 오지만
그래도 시들어 버린 풀에 눈 마주치고
마른 억새 숱에 지은 벌레집도 눈 맞춘다
그런 날이 길어지지만
엎치락뒤치락 뭉텅뭉텅 흘러가는 물살 소리가
봄물로 물든다고 속삭여 주려는지
아까부터 쇠백로가
목을 길게 추켜세우고
슬금슬금 쳐다본다
『책장 사이에 귀뚜라미가 산다』, 문학들, 2021.
감상 –
햇살 한 잎 입에 물고
청둥오리 떼는
살 속까지 파고드는 차가운 물위를 떠다닌다
오래도록 새 울음에 젖은 물살이
마른 강판 같은 겨울을 건넌다
「겨울 강」 전문
「겨울 강」에서 보듯 김황흠 시인은 시화집 『드들강 편지』(2018)로 드들강 소식을 전한 바 있다. “얼음장 아래로 흐르는 물이 따뜻하다고 / 다들 천연의 구들장에 한발씩 지지는 거다”며 「왜가리 떼」의 동정을 살피고 “누구 하나 들여다보지 않아도 / 억수로 똘똘 뭉쳤다가 일시에 봄을 피워낸다”며 강변의 「갓 꽃」을 노래하기도 한다.
드들강은 화순에서 발원해서 나주, 광주를 지나며 영산강에 흡수된다. 그 어디쯤에 시인은 농사일을 하며 시를 쓴다. 매일같이 강가를 나와 주변 변화를 살피고, 일상을 돌아보고 정리하는 것을 자신의 소명으로 생각한다. 앞서 시화집에서 생태하천 정비란 그럴듯한 이름으로 드들강의 생명들이 훼손되는 것에 대해서 “미안하다 무조건 미안하다”고 고백하기도 했던 시인은 새로운 시집 『책장 사이에 귀뚜라미가 산다』에서도 드들강 소식을 전해준다.
물난리로 고추 농사를 망치고 근심도 있었을 테지만 시인은 강의 이야기에 좀 더 귀를 기울이는 것으로 시간을 보낸다. 계절 따라 시든 풀에도 눈을 주고, 말라가는 억새에 깃든 벌레집에도 눈을 맞춘다. 겨울을 견디는 벌레를 안쓰러워하거나 응원하는 마음일 것이다. 시인이 대놓고 말을 내지는 않았지만 한해 농사를 망치거나 뜻하는 일이 풀리지 않아 속상한 이웃의 마음들도 벌레집의 벌레와 같이 어려운 때를 잘 견디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강물의 기척은 하루하루 봄에 대한 기대를 현실로 바꾸어 놓는다. 마침내 강 안팎이 봄물로 물들면 숱한 생명들이 기지개하며 풀꽃도 쇠백로도 벌레도 저마다의 서사를 열어나가게 될 것이다. 지금쯤 드들강지기 시인의 노트엔 봄기운이 왁자하겠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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