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달리 씨네 쌀 배달하기 / 변홍철

톰소여와허크 2022. 6. 15. 23:45

달리 씨네 쌀 배달하기 / 변홍철

 

 

나는 자동차도 없고 자전거도 없는데

주인이 쌀 배달을 나가라고 한다.

어깨에 쌀 한 가마니를 얹고 달렸다.

십 리가 넘는 길이라고 했다.

 

알 듯한 얼굴의 세 인물이

동행이랍시고 따라나섰는데

아무 도움도 안 된다. 자기들끼리 찧고 까분다.

 

누렇게 벼가 익은 들판이다

저기에는 복사꽃이 환하게 핀

풍경은 아름다운 그림 속.

 

소나기도 내리고, 나는 흠뻑 젖었는데

이상하게 별로 힘은 들지 않는다.

아니 힘은 펄펄 남아돌아 한참을 더

달릴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다만 배달 가는 집을 못 찾겠어서 짜증이 난다.

 

휴대폰도 없는 나는 뒤에서 찧고 까부는 이들에게서

전화기를 빌려 쌀 배달시킨 집 주인이랑 통화,

, 아는 목소리다. 푸른 기와집에 산다고 했던가.

친절하긴 한데 설명이 너무 길다.

용건만 간단히 말하라고 조금 짜증을 냈다.

 

겨우 위치를 확인하고

다시 쌀가마니를 어깨에 얹으려는데,

아뿔사, 비에 젖었던 쌀이 벌써 밥이 다 됐다가

어느새 식어버렸다.

 

동행한 인간들은 어디서

맛있어 보이는 김치 한 보자기를 얻어 와서는

밥 먹고 가자고 떼를 쓴다. 겨우 떼어내고

그래도 배달하는 게 내 일이니

찬밥이 다 돼 버린 쌀이지만

일단 갖다주고 자초지종을 설명해야 한다고

 

도움 안 되던 동행들은 어느새

영감 할마시가 되어서, 자기들은 더 못 가겠으니

갔다 와서 막걸리나 같이 마시자 한다.

 

나는 자동차도 없고 자전거도 없고 휴대폰도 없는데

주인이 또 배달을 나가라고 한다.

길을 질퍽거리고, 나는 매번 허기가 진다.

 

- 『이파리 같은 새말 하나, 삶창, 2022.

 

감상 정신분석학의 문을 연 사람은 프로이트다. 인간 무의식에 주목하여 인간 행동을 이해하는 단서를 무의식에서 찾는 이론을 정립시킨 장본인이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이해하는 방편으로 꿈 해석을 적극 시도했다. 현실에서 억압된 욕망이 무의식에 잠재되어 있다가 꿈으로 발현된다고 했다. 다만, 욕망이 위장되거나 왜곡된 형태로 나타나기에 꿈 해석을 통해 욕망을 바로 알아차리기란 간단한 일이 아니다.

프로이트나 융이 그랬듯이 자신과 남의 꿈을 분석해서 억압된 욕망을 알아차리거나 안내해준다면 삶을 사는 데 퍽 요긴한 일이 될 것이다. 변홍철 시인이 자신의 꿈 내용을 메모해 두었을 때도 왜 이런 꿈을 꾸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애초에 있었을 것이다.

대개의 꿈이 그렇듯 시인의 꿈도 논리와 인과를 초월해 진행된다. 쌀가게 주인의 요구대로 쌀 배달을 나가는데, 어떤 이동 수단도 지원되지 않고 어떤 누구도 도움 주지 않는다. 배달 주소가 불분명하고 집 주인이 불친절해서 짜증도 난다. 그런 중에 쌀은 엉뚱하게도 밥이 되어 식어버리고 자신은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하고 싶어 한다.

꿈 분석은 꿈의 재료가 된 현실 경험이나 욕망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꿈을 꾼 시인이 꿈 분석을 제일 정확하게 할 수 있겠지만 이왕에 시의 형태를 빌려 세상에 내놓았으니 제 삼자의 의견도 기대가 된다. 내가 보는 꿈의 주인공은 스스로 짐을 진 자다. 그 무게를 나누고 싶어도 동행은 그럴 의사를 내비치지 않는다. 쉬어 가기를 바라고, 밥과 막걸리를 탐하는 동행은 무의식중에 그런 걸 추구하는 또 다른 자아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도덕과 양심으로 무장된 의식적 자아는 무의식이 그리는 낭만적 자아를 영감, 할마씨까지 만들어가며 애써 거리를 두려고 한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현실 무게와 책임감에 눌려 힘들어지는 면도 있을 것이다.

꿈 분석 결과, 낭만과의 동행도 일정 부분 고려해보는 게 어떠냐는 어중이떠중이의 해석지를 시인에게 내밀 생각은 없다. 시에서 느껴지는 유머가 시의 제목에도 또 보이는 걸 보면 시인은 이미 낭만파다. 쌀 배달하는 달리 씨는 내내 달리는 달리 씨고, 프로이트의 이론을 그림으로 전폭 수용한 화가 달리 씨이기도 하다. 배달 가는 달리 씨를 만나거든 짐을 나누어 지지는 못하더라도 목 축일 막걸리 한 잔을 먼저 건네는 정은 있어야겠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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