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가 이끄는 평상의 낙서 / 문동만
나보다 오래 산 참나무에서
상수리 떨어져 조용히 굴러간다
흰둥이는 상수리 냄새를 맡았다가
먹을 수 없는 것들을 체념하고
나도 가리는 것이 있어 꺾어지지 않고
식량에 체하지 않고 요행이
여기까지 굴러왔구나 이런 생각이나
굴린다
우리는 평상에 엎드려 찐 밤을 까먹는다
나보다 밤을 더 좋아하는 강아지가
더 사람 같구나 생각이 들고
까먹으며 까먹는다는 말이 온 곳이
어디 사전 속인가, 어떤 주머니던가
자궁 속이나, 어디 점방이던가 하며
말에 말을 물고 흩어지고 모이는
구름들을 허밍으로 당긴다
평상에 누워 평(平)이라는 말,
평평 평등 평화 평정 평온 평원
오, 아들은 평발이로군
넓게 퍼져야 할 아깝고도 애틋한 말들을
오는 것 같았다가 돌아가는 말들을
까먹는다
-『설운 일 덜 생각하고』, 아시아, 2022.
감상 – 참나무과인 상수리나무와 굴참나무와 밤나무는 이파리 생김새가 비슷하다. 상수리나무에 비해 굴참나무는 수피의 굴곡이 심하고, 이파리 뒷면이 흰빛을 띤다. 밤나무는 이파리 색이 더 진한 녹색이고 수피도 차이 나겠지만 무엇보다 도토리와 확연히 구별되는 밤톨을 내놓는다.
도토리를 꺼리고 밤알을 좋아하는 흰둥이처럼 시인도 싫어하고 좋아하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평등과 평화를 좋아한다는 것은 평등을 깨는 차별, 평화를 깨는 전쟁을 싫어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평정과 평온을 좋아하는 만큼 그걸 흩뜨리기 십상인 사소한 기대나 욕심마저 경계하면서 살고자 할 것이다. “나는 평평한 게 좋고 너그럽고 낙관적인 마음들이, 스며가는 느릿느릿한 물 같은 마음들이 좋다”는 시인의 산문 그대로일 줄 안다.
한자 평(平)은 저울의 모습이다. 저울은 왼쪽과 같은 무게를 오른쪽에 두어야 수평을 이루게 된다. 한 쪽으로 기울지 않아야 하고, 바닥에 나란히 닿아서도 균형을 잃지 않아야 평이 된다.
하지만 평이란 것이 평상에 누워서 구름만 본다고 해서 되는 건 아니다. 도토리 한 알 굴리고 밤 한 알 까먹으면서 평등과 평화와 평온의 ‘평’을 친구 삼고자 해도 평은 그냥 있지 않는다. 심지어 오는 길로 돌아가기도 한다. 그러니 평을 아주 까먹지 않기(잊지 않기) 위해서라도 까먹는(음미하는) 시를 남겨두는 것일 테다.
마음 바닥을 평평하게 닦고 있을 문동만 시인은 탁구 고수란 소문이 나돈다. 탁구도 이쪽 저쪽이 기울지 않을 때 더 재미난다. 표 나게 기울 때는 한 쪽에 점수를 더 주어 승률이 고르도록 맞추어준다. 시인은 라켓 하나 들고 이웃에 다녀가기도 하는 모양인데 언제 이쪽 바닥에서 일합을 겨루게 된다면 서로 이기지 않기 위해서 애쓰는 모습을 보게 될지 모른다. 나도 시인만큼 평등과 평화를 좋아하니까. 단, 평일만큼은 좋아하기가 쉽지 않다. 수요일이 평일에서 휴일로 얼른 승격되어 그날만큼은 온종일 평상에 누워 구름을 보거나, 동네 탁구장에서 땀을 빼고 맥탁 한 잔 나누면 좋을 것이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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