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반려 / 노천명

톰소여와허크 2022. 7. 27. 14:48

반려(斑驢) / 노천명

 

도무지 길들일 수 없는 내 나귀일레

오늘도 등을 쓸어주며

노여운 눈물이 핑 돌았다

그래도 너와 함께 가야 한다지……

 

밤이면 우는 네 울음을 듣는다.

내 마음을 받을 수 없는

네 슬픈 성격을 나도 운다.

 

- 산호림(1938) / 사슴의 노래 - 노천명 전 시집, 스타북스, 2020

 

 

감상 :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로 시작되는 노천명의 사슴은 한때 시인의 자화상을 얘기하는 걸로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근래, 시인 백석과의 교류가 알려지고 1936한 개의 포탄”(김기림의 말)처럼 등장한 백석의 시집 제목이 사슴인 게 우연의 일치만은 아닐 거라는 짐작이 있었다. 여기에 당대 모윤숙, 최정희, 노천명으로부터 백석이 사슴으로 불리던 편지 등이 공개되면서 사슴의 주인공을 백석으로 인식하는 분위기도 적잖다.

노천명과 백석, 둘만의 사연을 증거해줄 다른 자료가 나오지 않는다면, 두 사람의 감정은 우정과 사랑 그 어디쯤에 모호하게 걸쳐 있었는 듯도 하다. 백석은 신현중이 소개해준 통영 여자에 마음이 가 있는 상태였고, 노천명은 김기림에게 구애를 받았으나 냉담하게 거절하더라는 최정희의 증언이 있다. 함흥으로 직장을 옮겨 가고 실연의 아픔도 겪은 백석이 나와 나타샤와 힌당나귀(1938)를 발표할 즈음, 노천명은 경제학 교수 김광진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이후 김광진은 인기가수 왕수복과 동반 월북해버리면서 노천명에게 큰 상처를 준다.

노천명의 반려(斑驢)엔 사슴 대신 나귀가 등장한다.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데 산을 쳐다본다사슴에서 목이 유난히 길었던 시인을 연상한 것처럼 나귀에서도 백석 시인을 떠올릴 수 있다. 나귀도 사슴처럼 목이 길 뿐만 아니라, 백석은 수필 <가재미·나귀>(1936.9.3. 조선일보)에서 나귀에 대한 애정을 밝힌 바 있기 때문이다. 나귀를 좋아해서 나귀 타고 동네(함흥 중리)를 돌고 싶고, 나귀 타고 출근도 하고 싶다는 내용을 노천명이 분명 읽었을 것이다.

시의 서두 도무지 길들일 수 없는부터 뜻대로 되지 않는 사랑의 줄다리기를 예감하게 된다. 서로에게 길들여진다는 건 특별한 사이가 되는 거라는 어린 왕자(1943)의 구절도 생각나지만 아직 발표되지 않는 글을 노천명이 읽었을 리는 물론 없다. “밤이면 우는 네 울음은 우정과 사랑을 한꺼번에 읽고 배신감에 힘들어하던 백석의 당시 상황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한자 반려(斑驢)는 얼룩 나귀 혹은 눈물로 얼룩진 나귀란 뜻이지만 인생의 반려(伴侶)에서 보듯 짝이 되는 동무란 뜻으로 새겨도 자연스럽긴 하다. “내 마음을 받을 수 없는 /

네 슬픈 성격을 나도 운다는 표현에서 사랑의 안타까움과 함께 상대의 심사를 읽어주고 걱정해주는 우정의 깊이도 느껴진다.

북쪽을 선택한 백석은 양치기 노인으로 잊히었다가 남쪽에서 반세기만에 최고 시인으로 화려하게 부활한 반면에 노천명은 부역 혐의로 6개월 간 옥살이를 한 뒤에, 독신으로 살다가 병상에서 쓸쓸히 죽었다. 한때 사랑받는 시인이었지만 14편의 친일 시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후 교과서든 잡지든 이야깃거리에서든 시인의 흔적은 눈에 띄게 사라지고 있다.

1956년경에 쓴 시인의 일기 한 대목을 보니, 남을 만한 작품을 써 보겠다는 생각과 함께 돈 걱정을 털어놓는다. 그 아래 한 구절이 눈에 오래 남는다. “나는 흉한 꼴을 남에게 보이기 싫다. 한데 그것은 아무래도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는 것만 같다

노천명 사후에 출간된 사슴의 노래(1958)아름다운 전설을 찾아 / 사슴은 화려한 고독을 씹으며 / 불로초 같은 오후의 생각을 오늘도 달린다. / / 더불어 꽃길을 걸을 날은 언제뇨 / 하늘은 푸르러서 더 넓고 / 마지막 장미는 누구를 위한 것이냐. / (오월의 노래)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때의 사슴은 시인의 자화상일 가능성이 커 보이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자취를 안고 있는 것으로도 보인다.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힌당나귀에서, 나타샤의 정체가 누구인지 지금까지 설왕설래가 있지만 노천명도 상당한 지분이 있을 걸로 생각한다. 정작 당사자들에겐 중요하지 않은 문제일 수도 있지만.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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