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초와 이육사의 「파초」 / 이동훈
신석초(1908-1975)는 충청도 서천 출신으로 석북 신광하의 7세손이다. 1935년, 스승으로 따르던 위당 정인보(1893-1950) 집에서 네 살 위인 이육사(1904-1944)와 인사하고 바로 지기가 된 두 사람은 이육사가 북경 감옥에서 옥사할 때까지 각별한 우정을 나눈다. 경상도 안동이 고향인 이육사는 퇴계 이황의 14세손이다. 두 사람은 서로의 고향집을 번갈아 방문하고 부여와 경주를 함께 여행하기도 한다. 근래, 이육사 문학관이 주도한 이육사의 육필 전시에서 신석초에게 보내는 네 편의 엽서가 전시되기도 했다.
두 사람은 파초에 관한 시편을 한 편씩 남겼는데, 신석초의 시에 ‘육사에게’란 부제가 붙어 있고 발표 시기가 먼저인 걸로 보아 이육사의 시는 이에 대한 화답시로 보인다.
근대 문학작품에 파초에 관한 이야기가 흔한 것은 아니다. 두 사람보다 조금 앞선 시기에 “조국을 언제 떠났노 / 파초의 꿈을 가련하다”로 시작해서 “너의 그 드리운 치맛자락으로 우리의 겨울을 가리우자”(《조광》,1936.1. / 『파초』,1938.)로 끝나는 김동명(1900-1968)의 시가 널리 알려져 있고, 이전에 이태준(1904-?)의 수필, ‘파초’(《청년조선》1934.10. / 『무서록』,1941.) 정도가 눈길을 끈다. 김동명의 경우, 파초를 통해 조국을 상실하거나 떠나온 상태에서 겨울이란 어려운 시기를 견뎌내야 할 것이란 메시지가 있다면 이태준의 경우, 파초를 키우며 파초 이파리에 듣는 빗소리를 즐기는 자신과 그걸 알아주지 않는 매정한 세상인심을 대비하여 뭉클한 감정을 자아내는 글이다. 이태준은 자신의 집 수연산방에 파초를 심고, 그걸 배경으로 가족사진까지 남겼지만 6.25전쟁은 가정의 행복을 앗아간다. 육사 육형제 중 셋째 이원일, 넷째 이원조, 다섯째 이원창도 전쟁 중 월북을 택한다.
그럼, 파초에 관한 신석초의 시를 먼저 보자.
황혼의 쇠잔한 노을이
소리 없이 뜰 위에 나리고
파초가 드린 기인 소매 나부껴
잠깐 옛날의 근심을 돋우노나
속절없이 저무는 이 사이
방황하는 바람은 불어와서
황금빛 나는 네 가지에다
한숨 모여 비단의 띠를 흘려라
한숨 쉬는 묵은 파초 잎이여!
너는 아는가- 현세와 내
머언 인연이 짓는 어지러운 심사를
파멸하고 또 존재하는 것……
나는 있다- 이 고적한 것의 옆에
오오 퍼덕이는 옛날의 명정이여
- 신석초, 「파초 -육사에게」(《시학》,1939.3. / 『석초 시집』,1946.)
신석초의 파초는 김동명의 파초와 구별되고, 파초 잎에 빗소리를 듣는 이태준의 파초와도 다르다. 신석초는 노을을 배경으로 파초가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보고 있다. 파초 잎이 흔들리는 것을 소맷자락이 펄럭이는 것에 견주는 것도 운치가 있다. 아름다운 풍경 속에 들어 있으면서도 시인은 파초의 묵은 잎을 벗하는 태도를 취하며 어지러운 심사를 피력한다.
신석초의 심기가 고르지 않은 것은 묵은 잎 때문에 말미암은 것이겠지만, 자신이나 육사나 식민지 현실의 바깥을 떠돌고 있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도 있었을 것 같다. 하지만 신석초가 이육사와 가까이 교류하면서 이육사의 정체를 몰랐을 리 없다. 그러니 그의 복잡해 보이는 감정의 일면엔 독립에 대한 결의와 행동을 모색하고 있는 이육사의 뒷날을 걱정해주는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이육사는 1925년 윤세주(1901-1942) 등의 영향으로 의열단에 가입한 이래 반일 활동으로 몇 번의 옥고를 치렀고, 1932년 의열단이 난징에 조선혁명 군사간부학교를 세우자 윤세주와 함께 1기생으로 입학하여 졸업한다. 1934년엔 군사간부학교에 있었던 일이 발각되어 일본 경찰에 검거되고 7개월 수감 끝에 겨우 풀려났으니 이육사가 신석초를 만날 때는 이미 일경의 감시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상태였다. 신석초에게 이육사는 자기 자신을 잊고 대의를 위해 사는 사람일 것이다. 그 대의는 파초 잎처럼 또 명정처럼 깃발로 펄럭이는데 신석초 자신은 옆에서 부대끼는 마음으로 있을 뿐이란 생각도 했을 법하다. 명정(銘旌)은 죽은 사람의 관직과 성씨를 적은 깃발로 상여 앞에 나가는 것인데, 파초의 묵은 잎이 “옛날의 명정”과 자연스레 연결된 것이다.
명정에 쓰일 이름은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느냐에 따라 자랑이 될 수도 있고 수치도 될 수 있다. 그럼, 왜 시인은 “옛날의 명정”이라고 했을까? 옛날의 명정을 오늘의 명정으로 바꾸어 말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자랑스레 펄럭이는 깃발엔 그만한 작심과 희생이 뒤따라야 하는 것이니 말이다.
그렇지만 신석초의 「파초」가 마냥 어두운 것만은 아니다. 파초에서 “파멸하고 또 존재하는 것……”의 생명력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파초는 여러해살이풀이긴 해도 월동이 쉽지 않아서 주로 남쪽 지역의 정원이나 사찰에 식재되는데 뿌리가 얼지 않도록 방비가 된다면 뿌리 번식이 가능하여 모근이 수명을 다해도 새 생명을 얻어갈 수 있다. 그러니 묵은 잎이 새로운 잎으로 다시 돋아날 것이란 기대도 충분히 해볼 수 있는 것이다. 파멸이 파멸로 끝나지 않고 새로 진작하는 밑거름이 되는 이치를 시인은 깨치고 있다. 다만 그런 깨달음이 무색해질 만큼 현실이 암담하다는 것이 시의 분위기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신석초의 「파초」에 이육사는 얼마간 파초를 내면에 안고 지내다가 정성스레 답신을 적는다. 이육사의 「파초」다.
항상 앓는 나의 숨결이 오늘은
해월(海月)처럼 게을러 은빛 물결에 뜨나니
파초 너의 푸른 옷깃을 들어
이닺 타는 입술을 축여주렴
그 옛적 사라센의 마지막 날엔
기약 없이 흩어진 두 낱 넋이었어라
젊은 여인들의 잡아 못 놓은 소매끝엔
고운 손금조차 아직 꿈을 짜는데
먼 성좌와 새로운 꽃들을 볼 때마다
잊었던 계절을 몇 번 눈 위에 그렸느뇨
차라리 천년 뒤 이 가을밤 나와 함께
빗소리는 얼마나 긴가 재어보자
그리고 새벽하늘 어데 무지개 서면
무지개 밟고 다시 끝없이 헤어지세
- 이육사, 「파초(芭蕉)」(《춘추》,1941.12.)
1939년 서울 종암동으로 거처를 옮긴 이육사는 1941년 2월에 딸 옥비를 얻지만 그 무렵 폐병이 악화되어 경주 일대로 요양을 가게 된다. 위 시의 “항상 앓는 나의 숨결”은 그의 몸 상태를 반영한 말이기도 하다. 이육사의 수필 산사기(山寺記)(《조광》,1941.8)는 그가 요양지로 선택한 경부 옥룡암에서 쓴 글이고, 글의 청자로 설정된 S군은 이전에 경주 여행을 함께하기도 했던 신석초를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이 있다.
산사기 한 구절을 보면, “S군! 그러면 내가 금번 이곳에 온 이유가 어디 있는가도 생각해 보리라. 그러나 이유란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은 내 서울을 떠날 때 그대에게 부친 엽서와 같은 것이다. 다시 말하면 여행이란 이유가 필요하다면 그것은 여행이 아니고 사무인 까닭이다. 그러므로 내가 여행을 한다는 것은 여정(旅情)을 느낄 수 있으면 그만이다.”라고 했다. 병 요양을 여행 기분으로 바꿔서 전하는 것이나, 물가에서 해당화 꽃을 산 아래로 띄워 보내면 자못 풍경이 아름다울 거라는 문장을 접하면 강철 같은 독립투사의 면모보다는 인간적이고 낭만적인 모습을 새록새록 보여주는 느낌이다.
이듬해 7월 10일, 옥룡암이 발신처로 되어있는 이육사의 육필 엽서에도 수신자는 신석초로 되어있다. “석초형 나는 지금 이 너르다는 천지에 진실로 내 하나만이 남아있는 외로운 넋인 듯하다는 것도 형은 짐작하리라. 석초형 내가 지금 있는 곳은 경주읍에서 불국사로 가는 도중의 십리허에 있는 옛날 신라가 번성할 때 신인사의 고지(옛터)가 있는 조그마한 암자다.”라고 되어있다. 옥룡암에서 기거하면서 산 밖을 나서지 않고 아예 스님이 되는 것이 편하겠다는 반농담조의 소회도 들려준다.
위 시도 어쩌면 경주 가까운 동해 바닷가에 들러 바다에 뜬 달을 보면서 시상을 마무리했을 듯도 하다(해월(海月)을 해파리로 보는 시각도 있다). 두 넋이 흩어진 배경으로 “사라센의 마지막 날”이 언급된 것은 이육사와 신석초 두 사람만이 알고 서로 공유하는 정보가 바탕이 되었을 것도 같지만 파초와 바나나를 혼돈한 데서 떠올려진 이미지를 시어로 엮은 것으로도 볼 수 있겠다.
파초와 바나나는 같은 파초과에 속한다. 생긴 것은 비슷해도 파초는 중국 원산지로 온대식물이고 바나나는 동남아시아가 원산지로 열대식물이다. 바나나의 어원은 페르시아어에서 왔는데 원래 의미는 손가락이란다. 손가락은 바나나 열매 모습과 닮았다. 페르시아는 이슬람 세력에 흡수되고 이를 사라센으로 통칭하기도 하는 것이니 바나나 닮은 파초의 모습에서 사라센을 떠올린 게 무리라고 할 순 없겠다. 사라센의 많은 제국이 흥망성쇠를 거듭했듯이 조선의 현실도 쇠할 대로 쇠한 상태인데 넋이라도 온전하게 자리 잡고 있기를 바란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이다.
하지만 이육사의 마음은 더할 데 없이 서정적이며 또한 마음은 더 나은 미래에 가 있다. 이태준이 그러했듯이 귀를 순하게 해서 파초 잎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고 싶어 한다. 이태준은 저 혼자 앉아 빗소리에 귀를 내주지만, 이육사는 파초에게든 벗에게든 흥을 내며 빗소리의 길이를 함께 재어보잔다. 천 년 뒤라는 조건을 달았지만 한껏 낭만에 부풀린 유희적 태도가 아닐 수 없다. 이런 낭만과 여유가 있었기에 고단한 현실을 견디며 한 번도 지조를 팔지 않은 의로움을 실천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비는 그치고 어디선가 무지개는 오고 있다는 걸 시인은 안다. 그 무지개에서 만날 것을 생각하고 다시 헤어질 것을 말한다. 헤어지지 않으면 새로운 만남도 없다는 걸까. 각자 자기의 길을 열심히 걷는 중에 만날 사람은 다시 만나진다. 무지개계단 너머로 일찍 가버린 이육사는 삼십 년을 기다려 신석초를 주막에서 맞아주었을 것이다. 주막 한 쪽에 파초가 넘실거리고 있는 그림이 상상이 된다.
이육사는 여행 중에 낙동강 잉어회와 막걸리 다섯 잔을 마셨다며 서울에선 그저 상상만 하라고 신석초가 입맛을 다시게 할 엽서를 보낸 적이 있다. 저쪽 주막에서 그걸 먼저 갚는 게 우정이자 도리일 것이다. 신석초는 이육사가 대포로 막걸리 아홉 잔을 거듭하고도 멀쩡하더라고 놀라워한 적이 있었는데 그건 따라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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