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침 / 박경한
밤새 자란 수염을 깎는데
입술 언저리에 면도날이 닿지 않는다
입 속 혀가 입 언저리 오목한 부분을
볼록하게 받쳐주어서 면도를 마친다
꽃받침이 꽃을 앉히는 것처럼
책받침이 글씨를 앉히는 것처럼
혀는 말없이 자신의 소임을 다하고 있었다
입 속의 혀처럼 나의 앞길을 걱정하며
뒤에서 손전등을 비춰주는 사람이 있었다
뒤에서도 눈부신 사람이 있었다
나도 산밭에 심어둔 오이 지지대처럼
사소한 것들의 받침으로 살다가
목숨을 다한다면 얼마나 싱겁고 좋을까
『풀물 들었네』, 학이사, 2022.
감상- 입안의 혀처럼 군다는 표현은 듣기 좋은 말로 남의 비위를 잘 맞춘다는 부정적 의미로 종종 쓰인다. 말을 유창하게 잘할 것 같으면 혀에 빠다(버터)를 발랐느냐는 식으로 장난 반 부러움 반의 말을 하게 된다. 남에게 깊은 상처를 줄 수도 있는 말에 대해선 혀 안에 도끼 들었다는 경구로 이를 경계하기도 한다.
박경안 시인이 주목한 혀는 이런 경구와는 거리를 두면서도 실제 일상에서 혀의 긴요한 쓸모를 재치 있게 포착한 작품이다. 면도 시 면도날이 잘 들어가지 않는 입언저리를 혀로 받쳐주면서 면도가 수월하게 이뤄지도록 혀가 돕는 것을 놓치지 않는다. 누군가의 받침이 되는 삶의 가치가 번쩍하며 떠올랐을 것이다. 만약, 시인이 구석구석 부드럽게 밀어준다는 비싼 면도기를 사용했다면 이 시를 얻지 못했을 공산이 크다. 시 감각은 벼리면서도 피부 미용엔 무딘 성격이 시의 생산에 일조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시인의 얼굴 피부를 위해 잘 안 드는 면도날 대신 가위를 권하고 싶기도 하지만 시인만의 고유한 스타일에 함부로 간여할 일은 아니다.
박경한 시인은 오래전부터 자신의 앞길을 걱정하고 비춰 주는 사람이 있었음을 생각하고 자신도 누군가의 받침이 되고 싶어 한다. 시로 읽는 받침론을 따라가다 보니 “의식을 잃고 있는 작은 새 한 마리를 도와 / 다시 둥지로 보내줄 수 있다면, / 내 삶은 헛된 것이 아니리”라고 했던 에밀리 디킨슨의 시가 생각난다. 고통 받고 있는 존재나 작은 것들을 편들고 싶은 에밀리 디킨슨의 마음이나 “오이 지지대처럼 / 사소한 것들의 받침”이 되고 싶은 시인의 선한 마음이 전혀 다를 바 없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이 시의 묘미 하나는 기꺼이 받침이 되는 삶을 그냥 좋다고 얘기하지 않고 “싱겁고” 좋다며 얼핏 자리를 잘못 찾아든 것 같은 단어를 하나 보탠 데 있다. 싱겁다는 것은 독하고, 빈틈없고, 야물기도 한 것에서 두어 발 물러서서 짐짓 헐렁해지려는 마음일 테니 잘못 찾아든 듯한 그 자리가 오히려 이 시를 빛내고 있는 셈이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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