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흘러도, 그 장맛 / 이진환

톰소여와허크 2022. 12. 10. 10:38

흘러도, 그 장맛 / 이진환

 

어스름이 든 표정들을 들여다보며

가슴에 동여맨 조바심을 내려놓던 물 한 모금에

늘 열려있는 사립문이야 그렇다 쳐도

 

하루쯤 건너뛰어도 좋을 하루해를 등짐하고

치워도 어질러진 모습을 한 외진 집 댓돌 위에

좀 오랜 기억과 닮은 신발은

그림자에 닿도록 허리춤을 무너뜨린 억척이고 억장이었습니다.

 

손끝을 놓지 못하는 어머니의 봄 이른 나물에서 우리는 자라나고

햇살 기댄 담장에서 허기 쫓는 눈빛으로 다투었지만

 

밥맛 좋고 힘을 쓰는 데는 장맛보다 더한 것이 없다며

담그는 손에 정성이 여간 아니던 붉은 고추에 감스름한 장독을 열어두고

꾹꾹 누른 된장까지 턱 하니 볕에 내어놓으니 만석꾼이 어디 이럴까

 

아무리 힘든 일 닥쳐도 뭔 걱정이랴

맛나게도 쑥쑥 자라는 새끼들

어디가 깨져 다쳐도 저 된장 한 주먹 눌러 붙이면 하고 가슴 다지는

 

눈시울 뜨뜻해지는 저것들이라시며

 

차곡차곡 눌린 관절을 재촉하는 손 걸음으로

잠겨 운 바람을 회초리질 합니다

아직도 거두어야 하는 전생의 죄가 크다며

 

모자람도 그만한 것으로 돌아볼 줄 알아야

안쪽 열린 가슴으로 웃을 수 있다고

대처로 우리를 떠나보내는 손차양을 거두고

지붕 하얗게 덮은 눈길을 돌아서며 빈 몸이 되는 어머니는

원시림처럼 알 수 없는 힘으로 번져옵니다

 

-오래된 울음, 상상인, 2022.

 

감상 : 말 많은 집에 장맛이 쓰다는 속담이 있다. 잔말이 많으면 살림이 안 된다는 의미다. 말을 조심해서, 말을 가려서 하라는 뜻으로 헤아리면서도 속담의 장맛이 된장 맛일까, 간장 맛일까 잠깐 고민한 적이 있다. 메주를 소금물에 담가 건더기를 건져낸 것이 된장이고 그 나머지를 달여 낸 것이 간장이니 종지에 담겨 나가는 출세(出世)의 모양이 다를지언정 같은 장독 출신인 게 분명하다. 장독 안에 오래도록 뭉갠 시간이 장맛의 근본일 테니 된장 맛인지 간장 맛인지 애써 구별하지 않아도 그 맛이 그 맛이리니 싶은 것이다.

이진환 시인은 장맛을 통해 어머니를 소환하고 추억하고 기린다. 평생의 밭일과 가사 노동으로 허리가 굽은 어머니다. 자식을 건사하느라 어머니 손끝은 쉴 틈 없다. 가난한 시절, 해마다 농사지은 것으로 장을 담그고, 이른 봄이면 허기를 잊게 하는 나물을 무친다. 어머니의 자랑은 장맛이다. 그 장을 먹으면서 아이는 잔병을 견뎌내고 별 탈 없이 무럭무럭 자랐을 것이다. 심지어 어디가 깨져 다쳐도 저 된장 한 주먹 눌러 붙이면웬만하면 해결되는 것이었다.

자식이 성장해서 집을 떠나도, 어머니는 해마다 장을 담그고 자식은 그 장을 받아간다. 그런 어머니도 마침내 댓돌 위의 신발 한 짝으로 남게 될 것이다. 어머니는 빈 몸이 되어 오히려 자식의 가슴에 원시림처럼 가득 차게 되었다는 게 시인의 전언이다.

이제, 말 많은 집에 장맛이 쓰다는 속담은 그 뜻을 바로 알기 어려운 시대에 직면해 있다. 가족공동체가 해체되고, 그 안에서조차 말이 없어서 더 걱정이라고도 한다. 그런 중에도 묵은 장맛 같은, 부패하지 않는 사랑을 떠올려보는 시간이 있어서 적잖이 위로가 된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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