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가을이 오는 달 / 김현승

톰소여와허크 2022. 11. 30. 22:26

가을이 오는 달 / 김현승

 

구월에 처음 만난 네게서는

나프탈렌 냄새가 풍긴다.

비록 묵은 네 양복이긴 하지만

철을 아는 너의 넥타인 이달의 하늘처럼

고웁다.

 

그리하여 구월은 가을의 첫 입술을

서늘한 이마에 받는 달.

그리고 생각하는 혼이 처음으로

네 육체 안에 들었을 때와 같이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너의 눈은 지금 맑게 빛난다.

 

이달엔

먼 수평선이

높은 하늘로 서서히 바꾸이고,

뜨거운 햇빛과

꽃들의 피와 살은

단단한 열매 속에 고요히 스며들 것이다.

 

구월에 사 드는 책은 다 읽지 않는다.

앞으로 밤이 더욱 길어질 터이기에

앞으론 아득한 별들에서

가장 가까운 등불로

우리의 눈은 차츰 옮아 올 것이다.

 

들려오는 먼 곳의 종소리들도

이제는 더 질문하지 않는다.

이제는 고개 숙여 대답할 때다.

네 무거운 영혼을 생명의 알맹이로 때려

얼얼한 슬픔을 더 깊이 울리게 할 것이다.

 

그리고 구월이 지나 우리의 마음들

길가마귀처럼 공중에 떠도는 시월이 오면,

이윽고 여름의 거친 고슴도치는

산과 들에 누워

제 털을 호올로 뽑고 있을 것이다.

 

- 견고한 고독, 관동출판사, 1968. / 김현승 시전집, 민음사, 2005.

 

감상- 내게 김현승(19131975)플라타너스(1953), 가을의 기도(1956)로 기억되는 시인이다. 수피의 얼룩으로 인해 버즘나무로도 명명하는 플라타너스는 가로수로 많이 심었지만 장대하게 퍼지는 수세가 감당이 안 되어서 그런지 대부분 가지치기를 당해 훌쭉해진 몸매다. 영천 임고초등학교 운동장에 가면 수십 그루의 플라타너스 고목을 만날 수 있다. 자라는 것을 방해받지 않았을 때의 플라타너스가 어떠한지 그 장엄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김현승의 플라타너스는 광주 양림동에 주소지가 있다. 평양에서 태어난 김현승은 목사인 아버지를 따라 제주를 거쳐 1920년경 광주로 온다. 아버지가 목사로 있는 양림교회에 플라타너스가 있었다는 얘기가 있지만 그 나무는 베어졌다고 한다. 김현승이 산책하던 길에 플라타너스 한 그루가 더 있었지만 2015년경 남구청장 사택에 편입되면서 백 년 고목이 베어져 나가는 일이 또 생기고 말았다. 플라타너스를 향해 나는 오직 너를 지켜 네 이웃이 되고 싶을 뿐이란 했던 김현승의 시구가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김현승 시인은 가을과 고독과 커피를 유난히 좋아했다. 시 제목에 가을이 차용된 것만 해도 열두엇 편은 넘어 보인다. 양림동 호남신학대학 내에 있는 선교사 사택으로 가는 길은 김현승의 산책로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 김현승 시비가 있고 대표작으로 알려진 가을의 기도가 새겨져 있다. 1960년부터 김현승이 교수로 재직했던 숭실대의 시비에도 같은 시가 새겨져 있다. “가을에는 / 호올로 있게 하소서…… / 나의 영혼, / 굽이치는 바다와 /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 같이로 끝나는 시는 여전히 사랑을 많이 받고 있다. 가을의 기도는 이후 견고한 고독(1968)에 이어 절대고독(1970)의 세계를 추구해가는 시인의 정신적 궤적을 일찌감치 예언해버린 시 같기도 하다.

김현승은 고독 속에 사색의 깊이를 더하고, 고독 속에 존재를 자각하고, 고독 속에 영원에 닿거나 영원에 미치지 못하는 그 사이를 언어로 표현하고자 했다. 그의 성장 배경이 기독교인 것을 고려하여 고독과 구원을 바로 연결하는 것에 대해 시인은 그렇지 않다고 했다. 김현승 사후에 출간된 산문집 고독과 시(1977)를 보면, 신을 잃어버리고 신을 회의하는 데서 고독이 비롯함을 말한다. 자연대로 대세대로 살지 못하고 시비를 가려 비평하는 습성으로 문단에서도 고독한 면이 있었단다. 자신의 이러한 심정이 군중 속에 갇히지 않고 / 군중의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독한 이유)는 시구에 나타나 있다고도 했다. 술 대신 커피를 좋아했던 시인은 주전자 꼭지에서 따라져 나오는 빛깔을 보고 커피 맛을 짐작할 정도로 애호가임도 밝히고 있다. 1971년경 김현승은 고혈압으로 쓰러져서 사경을 헤매다가 한 달 만에 깨어난 일이 있다. 자신에게 만이 구원이라고 여겼던 시인은 그 자리에 신앙을 두는 변심을 보인다. 그렇게 좋아하던 커피도 줄이다가 말년엔 아주 끊었다.

김현승 시인은 술과 차에 대해서, “술은 인생을 잠재우며 마시는 데서 그 맛이 나는지 모르지만, 차는 인생을 깨우며 곰곰이 생각하며 마시게 된다고 했다. 말씀의 의미를 생각해보면서도 술과 차를 함께했으면 그 구별심이 줄어들었을 거란 생각도 든다.

이제 위 시를 보자. 고독 그 자체를 깊이 파고들던 김현승이 가을이 오는 달에 이르러 고독의 진수를 보여주는 느낌을 받는다. 가을의 기도와 마찬가지로 고독한 단독자의 사색이 바탕이 되었겠지만 가을의 기도보다 시인의 삶이나 생각이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다. 낡은 양복에 근사한 넥타이를 매고 상수리나무 아래에 눈을 반짝이는 는 시인 자신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때는 가을이다. 봄과 여름을 지나온 꽃들이 그때그때 열매에게 자리를 내주고 사라진다. “꽃들의 피와 살은 다른 무엇이 되어야 의미가 생긴다. 꽃이 꽃을 고집하면 열매도 없고, 열매가 없으면 내일도 없다. 가을이 깊어 상수리나무의 도토리도 익을 대로 익었다. 시인의 생각 또한 여물 대로 여문 것이어서, 껍질 밖으로 도토리가 튀어나가는 긴장과 탄력을 느끼게 해준다. 종소리와 고슴도치의 비유가 그렇다. 종소리는 무거운 영혼에게 얼얼한 슬픔으로 다가서도록 울리는 거란다. 슬픔을 공유하지 않는, 슬픔에 연대하지 않는 영혼에게 종을 울리는 말씀이 아닐 수 없다.

고슴도치가 제 털을 뽑는 행위는 사실, 수수께끼와 마주한 느낌이다. 털갈이 후 더 어른스런 고슴도치가 되는 거라면 고슴도치의 행위를 성장통으로 읽어도 좋겠다. 또 생각하면, 고슴도치에게 털(가시)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선한 마음으로 다가오는 지인이나 이웃에게조차 가시를 세워 해를 입히고 상처를 주기도 한다. 그러니 고슴도치가 털을 스스로 뽑는 것은 때로 필요하고 때로 불필요한 가시를 가려서 쓰는 성숙한 자세로 볼 수도 있겠다. 이처럼 이렇게도 저렇게도 수수께끼를 풀게 하는 것이 이 시의 재미라면 재미다.

시인은 이 가을에 책을 다 읽지 않았다고 하면서도 등불 아래 책을 놓는 시늉을 한다. 아마 좋아하는 커피도 옆에 두었을 것이다. 책을 통해 내 친구들의 썩지 않는 영혼”(())을 만나는 거라고 하더니. 이제 본인이 그런 책으로 남았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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