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집 / 김정수
겨울의 집에 사는 사람들은 알고 있지 허공에 창을 내고 소리 소문으로 드나들지 온기 없는 지상은 불타는 나무가 지키고 있지 그냥 만년설이지 문밖에 발 디딘 적 없는 불안이 얼음 침대에 누워 잠을 자거나 책을 읽지 피아노의 책장에서 부유한 숲을 잃어버린 마녀가 갑자기 튀어나와 달빛을 끄기도 하지 세상은 깜깜하게 투명하지 거꾸로 매달린 시계에서 꼬리별이 파닥거리다 숨이 멎지 순간 탐스럽지 사철, 우울 드리운 방에 커튼의 종말이 찾아오기도 하지 봄은 이불 속에 발을 집어넣었다 확 달아나 버리지 어쩌다 외출이 길 잃은 척 말을 걸기도 하지 침묵이 혼자 대답하지 녹색고지서가 배달된 날에는 북금곰이 쓰레기통을 뒤지지 그런 밤이면 죽음이 두툼한 외투를 구름에 매장하지 좌불안석이 내장된 의자엔 자작나무 숲 떠돌던 시간과 허기가 우두커니 앉아있지 바람이 몸을 뒤틀 때마다 젊은 힘줄과 늙은 핏줄이 튀어나와 비명을 질러대지 밤에도 별이 뜨지 않는 천장에서 거미처럼 기어 내려온 가족이 하루에 한 번 슬픈 식사를 하지 웃음은 적도의 전설, 입이 얼어붙지 아침이 와도 햇빛의 노동 외면하는,
냉장고, 텅 비었지
-『홀연, 선잠』, 천년의 시작, 2000.
감상 – 시는 너무 친절해도 안 되고 너무 감추어도 안 된다는 생각이다. 그 경계에서 무수한 시들이 쓰이고 있으며 그 중에 몇몇 시편들은 난해한 속에서도 시적 긴장감을 불어넣으며 흥미를 자아낸다. 「겨울의 집」도 그런 시로 이해된다. 동화적 요소를 차용하고 마녀와 북극곰까지 소환해서 “겨울의 집”이 갖는 이미지를 하나씩 더하지만 실제 의미하는 바는 모호하다.
녹색고지서가 닿으면서 겨울 집은 한층 음산해지고 괴기스러워지는 분위기다. 집과 구름 사이 죽음이 얼른거린다. 바람소리가 비명을 지르는, 마치 붕괴를 앞둔 ‘어셔 가’의 음울한 기운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다. 천장에서 거미처럼 내려온 가족이 슬픈 식사를 한다고 하니 도저히 현실의 가족으로 생각할 순 없다. 게다가 “웃음은 적도의 전설”이란 표현도 낯설기는 마찬가지다. 웃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얼어붙고 텅 빈 냉장고만 현장의 증거인 양 남았단다.
시인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리기 어려운 중에 독자들이 시를 읽으며 이런저런 생각을 갖게 하는 것도 시의 힘이다. 진술된 이미지를 통해서 얼핏 떠오르는 건 ‘송파 세 모녀 사건(2014년 2월)’과 이후의 유사 사건처럼 생활고로 인해 생을 포기한 가정의 참담한 모습이다. 밀린 월세를 미안해하는 가족의 집엔 전기세, 수도세 체납 고지서나 경고장이 쌓여 있기 일쑤다. 혹여 시인은, 춥고 배고픈 영혼이 죽어서도 “겨울의 집”에 갇혀 사는 것을 상상한 것은 아니었을까?
“웃음은 적도의 전설”이란 말을 다시 생각해본다. 적도는 남극과 북극에서 같은 거리에 있는 선이다.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은 선이라는 것이다. 부와 가난이 나뉘어, 부가 가난을 벼랑으로 밀치는 것은 잔혹하고 비정한 현실이다. 평등하게 가난해서 같이 웃는 것이야말로 동화이기도 하고 전설이기도 할 것이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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