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이야기 / 김석규
마흔 해 훌쩍 넘도록 살고 있는 동네
안면 터서 수인사하고 호형호제하던 사람들
이제는 눈 닦고 찾아보아도 없고
아이들 떠드는 소리마저 끊어진 지 오래
엎어지면 코 닿는 자리의 가게도 문을 닫았다.
늘 헐빈하게 비어 다니는 버스
타고 내리던 사람들 지키는 연쇄점
이젠 방수나 집수리 한다는 간판으로 바꿔달고
귀밑머리 새파란 새댁이 열었던 분식집
한 평이 채 될까 말까한 비좁은 곳
라면 국수 김밥도 말아 팔고
비 구죽죽이 오는 날은 노인네들 모여
정구지전 부쳐 막걸리로 주전부리도 했는데
문 닫고 어디로 갔는지 소식조차 감감하고
속절없이 물기 다 날아가버린 장작개비로
마흔 해 넘겨가면서 살고 있는 동네
-『눈』, 태산, 2023.
감상 – 시집 뒤편에 기록된 김석규 시인의 시집 권수를 헤아리니 몇 번의 공저와 시선집을 포함해서 일흔 권이 다 되어 간다. 평생 단 한 권의 시집을 남긴 시인도 있고, 열 권만 되어도 부지런히 책을 냈다는 인상을 받는 게 사실이다. 그러니 일흔 권을 헤아리게 된다는 이 사건 자체만으로도 남다른 흔적인 것은 분명하다.
개인적으론 시집을 5년이든 10년이든 기간을 두고 묵히고 익혀서 내는 것이 좋아 보이고, 앞 시집보다 뒤편의 시집이 더 나을 때만 출간하는 게 좋다는 생각을 갖고 있지만 시인마다 생활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주변 여건이 다를 것이기에 무엇이 더 낫다고 말하는 것이 조심스럽긴 하다. 또 어찌 보면 시를 사시오, 시를 읽으시오, 어디 호소하는 것도 아니고, 공기 쐬듯이 시를 느끼고, 밥 먹듯이 시를 쓰고 그걸로 한 채의 집(시집)을 완성해가는 수도자 같은 시인에게 외경의 마음도 갖게 된다.
김석규 시인의 시는 어렵지 않지만 시적인 정취를 바탕으로 시인의 시정신이 묻어나는 작품이 다수다. 「우리 동네 이야기」도 그런 작품이다. 경남 함양이 고향인 시인은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부산에서 대학을 졸업했다. 경남에서 교직 생활을 이어가는 중에 주거지를 부산에 두고 지금까지 마흔 해 이상 살고 있는 걸로 보인다. 시인의 시에 묘사된 동네 정경은 도심 외곽의 전형적인 풍경이다.
돈을 벌기 위해서, 돈을 쓰기 위해서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가는 사이 도심 내부는, -수도권은 도심 안팎 가릴 것도 없지만- 몰려든 사람을 수용하기 위해 각종 빌딩과 고층 건물로 몸살을 앓고 있다. 그 반대로 사람들이 떠나간 동네는 떠나간 만큼 빈 집이 늘어나며 갈수록 썰렁해지고 있다. 노인은 노동 대신 추억을 팔고 젊은이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아이들이 없는 학교는 폐교가 되어간다. 시골뿐만 아니라 지방 중소도시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시인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서 상념에 잠긴다. 사람들이 빠져나가니 버스는 비고 가게도 문을 닫는다. 막걸리 한 잔 나누던 분식집, 조그만 아지트도 사라지고 없다. 한때 북적거리던 것이 조용해진 그 자리에 이제 “물기” 빠진 시인만 남았다는 독백이 여간 쓸쓸한 게 아니다. 낮엔 아이들이 라면이나 떡볶이를 먹고, 저녁엔 어른이 정구지전에 술 한 잔 하는 그런 공간, 그런 낭만이 점점 사라지는 현주소를 시인은 애써 기록해둔다.
독자는 우리 동네에 그런 곳이 있는가 없는가 따져보며 안도하기도 하고 서운해하기도 하겠지만 창밖을 보면 편의점 불빛만 따가울 공산이 크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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