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먼드 카버(김연수 역), 『대성당』, 문학동네, 2007.
-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소설 모음집. 레이먼드 카버는 1938년 미국 오리건 주에서 가난한 제재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른 결혼에 이어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지만 한동안 알콜중독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시절이 있었다. 마흔에 이르러서 금주에 성공했으나 아내와 헤어졌다. 곧이어 「대성당」(1983) 등으로 문명을 떨치기 시작했으나 1988년 암으로 작고했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알콜 의존증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소설가 자신과 무관하지 않은 걸로 보인다. 단편 「칸막이 객실」의 마이어스는 이혼 후 혼자 사는 남자다. 8년 만에 아들의 편지를 받고, 아들이 있는 스트라스부르에 갈 생각을 한다. 아들에 대한 기억은 부부싸움 중인 마이어스에게 아들이 대들었던 것이 마지막 모습이다. 고민 끝에 마이어스는 휴가를 낸다. 이탈리아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오는 길에 스트라스부르에 들러 아들을 만날 생각이었지만 스트라스부르 역에 내리지 않는다.
아들에게 주려는 손목시계를 도둑맞아서다. 손목시계를 도둑맞은 후에야 자신이 아들에 대한 애정이 없다는 걸 스스로 깨우친다. 손목시계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손목시계가 사내의 모든 기분을 틀어버리는 듯한 모습이다. 이 모습이 아주 낯선 것은 아니다. 사소한 것을 사소하게 지나치지 못하는 성격 장애가 예기치 못한 파국을 부르는 일이 현실을 닮았다고 말할 수밖에 없겠다.
「대성당」은 얼핏 제목에서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의 ‘대성당들의 시대’가 연상되는데, 1998년에 극이 초연되었다고 하니 직접적 연관은 없을 성싶다. 소설 속 아내의 취미는 일 년에 한두 번 시를 쓰는 것과 맹인 친구와 테이프로 서로의 육성을 담아 주고받는 일이다. 아내는, 자신의 아내를 잃은 맹인을 집으로 초대하고 남편인 ‘나’는 술을 마시는 중에 맹인 손님을 맞는다. 대성당은 마침 방영되는 텔레비전 프로다. 프랑스 파리의 대성당에서 이탈리아의 대성당 또 포르투갈 리스본 인근의 대성당으로 장면과 해설이 옮겨간다.
독일 대성당까지 나아갔을 때, ‘나’는 자신이 보고 있는 것에 대해서 맹인에게 전하며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가고 싶은 마음이 대성당에 있다고 말한다. 신앙심이 있느냐는 맹인의 질문엔, “뭘 믿는 건 없다고 봐야겠죠. 아무것도 안 믿어요. 그래서 가끔은 힘듭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라고 대꾸한다. ‘나’는 맹인의 요구로 대성당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림을 손가락으로 확인하던 맹인은 ‘나’의 손가락에 자신의 손가락을 얹어 대성당을 함께 그린다. ‘나’는 눈을 감은 상태다. 맹인은 그림을 보라고 주문하지만 ‘나’는 눈을 뜨지 않은 채, “나는 우리집 안에 있었다. 그건 분명했다. 하지만 내가 어디 안에 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며 들뜬 감정을 표현한다. 안에 존재하면서 안과 밖의 경계를 잊고 자유로이 넘나드는 영혼의 모습이 그려진다.
진술된 문장으로 ‘나’의 심리상태를 예단하기 쉽지 않지만 뮤지컬 노래처럼 사뭇 감응되고 크게 진작된 기분만은 진실이다. 그 진실이 독자의 내부 방에 들어 노크 소리를 내는 걸 내 귀가 듣는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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