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반반의 묵죽 / 김윤현

톰소여와허크 2023. 5. 29. 22:37

반반의 묵죽 / 김윤현

 

속을 비워 그럴까

어지러이 부는 바람에도 꺾이지 않는 대나무

여백은

또 그걸 알고 흔적도 없이 세상으로 내보낸다

그려서 반, 그리지 않아서 반

오오, 반반의 극치여!

나는 아직도 대나무를 그리는 데만 급급하니

그 언제 반반한 묵죽도 한 점 제대로 그릴 수 있으려나

 

-『반대편으로 걷고 싶을 때가 있다, 한티재, 2022.

 

감상- 근자에 칼보다 푸른 기개란 표제로 천석 박근술 회고전이 있었지만 아쉽게 놓쳤다. 먹만 가지곤 푸른색을 내지 못하겠지만 대나무의 속성과 그걸 담아냈을 묵죽도의 모습을 잘 반영한 제목이란 생각이 든다. 김윤현 시인이 보았을 어지러이 부는 바람에도 꺾이지 않는 대나무도 그런 기개를 표상하고 있다. 대나무가 꺾이지 않는 것은 속이 꽉 차서 그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속을 비웠기 때문이란 추측도 곧 수긍이 된다. 속을 비워서 유연할 수 있었고, 유연했기에 꺾이지 않고 바람을 견뎠을 거란 추리가 가능한 대목이다.

그럼, 시인이 반반의 극치라고까지 얘기한 묵죽도의 주인은 누굴까. 앞서 천석 박근술(1937-1993)은 죽농 서동균에게 사사받은 이력이 있다. 이문열의 금시조는 석재 서병오(1862-1935)와 죽농 서동균(1902-1978)을 모델로 하고 있는 흥미로운 소설이다. 석재는 1922년 교남시서화연구회를 발족시켜 서화 교육, 서화 교류, 서화 전시에 큰 역할을 담당했고, 죽농은 석재 사후, 교남시서화연구회를 영남서화회로 이름을 바꾸어 운영함으로써 지역 서화 발전을 꾀한 인물이다. 소설 속, 두 인물의 갈등 지점은 서화에 대한 인식 차이 때문이다.

석담(석재 서병오가 모델)은 서화를 심화(心畵)로 보고, 고죽(죽농 서동균이 모델)은 심화(心畫)와 물화(物畵)에 우열은 없고 선택의 문제일 뿐이라고 본다. “물화란 사물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면서 거기다가 사람의 정의(情意)를 의탁하는 것이고, 심화란 사람의 정의를 드러내기 위해 사물을 빌려오되 그것을 정의에 맞추어 가감하고 변형시키는 것”(소설 인용)인데, 석담은 단연코 뜻()이 우선이란다. 서화는 물()을 빌려 내 마음을 그리는 것인즉 반드시 물의 실상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는 주의다. 나라를 빼앗긴 후 그의 그림에서 댓잎이나 매화송이가 현저하게 줄어든 이유도 뜻과 관련이 있다. 고죽은 의() 못잖게 표현의 정()을 중요하게 여긴다.

도가 없으면 예도 법도 없다는 게 석담의 입장이고, 예가 지극하면 도에 닿기도 한다는 게 고죽의 입장이다. 둘은 양보 없이 대결하고 제자는 스승을 떠났지만 다시 스승 곁으로 돌아온다. 제자는 임종을 앞두고 자기 작품을 모아서 불태우며 화염 속 금시조의 날갯짓을 본다. 독자 입장에선 스승이 이룬 경지에 제자도 가 닿은 듯한 느낌을 받게 되면서 소설은 마무리된다.

김윤현 시인이 마주했던 묵죽도는 여백 반에다 그리지 않아서 반이니 소설 속 석담의 서화에 가깝다는 인상이 든다. 대나무를 그리는 데 급급하다는 화자의 푸념에 고죽은 그래도 그 과정을 충실히 하는 게 공부하는 사람의 길이라고 훈수를 둘 법하다. 하지만 화자는 석담과 고죽 사이 화자 자신의 길을 고민하면서 어느 것도 아닌 자신만의 묵죽도를 남겨야 할 운명이다. 서화 이야기지만 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반을 그리되 전체가 살아나고, 반만 쓰되 울림은 더 커지는 반반의 경지가 참으로 매혹 대상이 되는 건 다른 데 있지 않다. 반반한 작품 하나 남기고 싶다는 모든 작가의 꿈과 연결되기에 매혹은 부풀려지고 저만치 떨어져서 분발심을 일으키게 한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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