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모듬살이 / 김병해

톰소여와허크 2023. 6. 18. 23:54

모듬살이 / 김병해

 

올해도 마당귀 들꽃 더미 여럿 담뿍

어름더듬 곁을 넓혀 무람없이 들어앉는다

해마다 들이미는 해사한 낮은 호명

들며 나며 눈인사만 멀찍 건넸댔는데

 

여러 해 어깨맞춤하며 마주하다 보니

꽃문 여닫는 시기며, 본곶은 어디인 것 하며

 

새새틈틈 드는 길손, 바다 구름 벌 나비랑도

살가운 안면 트는 막연지간이다 싶어

 

입때껏 너나들이하며 두루뭉술 한집살이

맹랑한 무단잠입 내내 눈감아 줬더니

글쎄나 그새 거푸 슬하 식솔 여럿 불려

흔전만전 붙박이로 눌러앉을 모양이네

 

이참 만부득이 집세 솔찬히 받아낼까 보다

얼추 어림셈해도 곳간 꽤나 두둑하겠네

허나 어쩌랴,

나 또한 저들과 어금지금

이곳 별 잠시 들른 무전취식 모듬살이인 것을

 

-『오늘은 너에게로 진다, 문학의전당, 2023.

 

감상 시인의 집 마당 한쪽에 들꽃이 제법 자라나 보다. 심거나 가꾼 것일 수도 있지만 세를 물릴 작정까지 하는 걸 보면 들꽃이 저들 마음대로 자리 잡았을 공산이 크다. 세를 내지도 않고 들어와서 식구를 불리는 불청객 명단에 대해서 슬쩍 신상 공개에 나설 법도 한데 시인은 끝내 함구한다.

시인의 다른 시에서 보자면, 무단잠입(노골적으로 들어오는 침입 대신 몰래 숨어드는 잠입이란 표현을 쓴 데서 불청객에 대한 시인의 태도를 짐작해보게 된다) 후보 일순위는 앉은뱅이꽃이다. 앉은뱅이꽃은 백주염천 한자리에/ 가부좌 튼” (앉은뱅이꽃) 꽃이다. 제비꽃, 채송화, 민들레 등의 지역 방언으로 앉은뱅이꽃이란 말을 쓰는 걸 보면 앉은뱅이꽃은 키가 작은 꽃을 두루 지칭하는 말로도 볼 수 있다. 꽃다지, 민들레, 꽃마리, 개망초처럼 꽃대를 올리기 전에 바닥 가까이 붙어서 방사형으로 잎을 내는 로제트 형 식물은 그 자체로 앉은뱅이란 생각도 든다.

시인은 이런 키 작은 친구들을 면밀히 관찰하면서 관찰자 그 이상의 어떤 우월의식도 갖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도 앉은뱅이가 되어 어깨맞춤해서 대상을 마주하고 동등한 존재로 대하려고 한다. 이처럼 이 시에는 작은 식물에게도 미치는 수평적인 시각이 자연스레 녹아 있다. 시인은 이 평화로운 마당의 주인임을 자처하지 않고 마당의 모든 친구들과 너나들이하는 모듬살이 일원인 것에 자족한다.

다 같은 무전취식 모듬살이팔자라 하더라도 취식(取食)으로 인한 갈등과 다툼이 없을 순 없다. “윗몸 일으키기 선수”(쑥대밭)인 쑥이 마당 질서를 어지럽힐 수 있고, 개망초가 자기 식구만 챙기려는 습성을 보이며 마당을 장악하려 들 수도 있다. 말하자면, 모듬살이 현장에 눈감고 지나치기 어려운 상황이 벌어지는 셈이다. 그때 시인의 선택지엔 어떤 것이 있을지 궁금해진다. 모듬살이 문제에 대해 시인의 고견을 더 들으려면 막걸리집에서 모듬전을 사야 할지 모르겠다.

김병해 시인의 모듬살이을 읽으면, 우리말 어휘를 정성스럽게 익히고 맛깔나게 살려서 적재적소에 갖다 쓴 시라는 생각도 안 할 수 없다. 공부 삼아 뜻풀이 몇 개를 적어본다.

 

어름더듬: (부사) 말을 자꾸 더듬으며 우물쭈물 행동하는 모양.

새새틈틈: (명사) 모든 사이와 모든 틈.

흔전만전: (부사) 매우 넉넉하고 흔한 모양.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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