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일, 『숲과 대화할 시간입니다』, 학이사, 2023.
- 무슨 일이든 그 일이 좋아서 시작한 것이라는 가정 하에 10년 차가 되면 그 일에 익숙해지고, 그 일을 좋아하는 마음이 더 깊어지고 그런 만큼 그 일의 가치와 매력에 대해서 할 말이 풍성해진다.
모든 스포츠를 섭렵한 저자는 테니스에 푹 빠져 가정에 소홀했던 시절도 있었고 골프, 탁구 등에도 상당한 시간을 바쳤지만 그가 정작 미는 것은 순간적으로 힘을 써야 할 스포츠 대신에 숲속 걷기다. 저자는 앞산 자락 고산골 숲 걷기 10년 차다.
이 책은 숲 걷기가 얼마나 좋은지에 대한 10년 차의 시각을 넘어서 30년, 40년 고수의 아우라가 있다. 숲 걷기보다 오래 이어온 신문기자의 감각으로 고산골을 30년, 40년 찾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포함해서 고산골에 와서 일상의 긍정적 변화를 꾀한 사람들에 대한 취재기 성격을 띤 것이 저자의 숲 예찬에 설득력을 더해주고 있다.
고산골 경험이 책으로 결실하기까지 10년 차가 주는 의미가 분명 있겠지만 수치 자체에 의미 부여하는 것을 저자는 경계한다. 고산골 천 일 약속을 스스로 정하고 500일을 기념하여 떡까지 돌리고 주변에 신뢰를 쌓던 사람이 천 일을 달성한 것을 끝으로 고산골에서 사라진 것을 저자는 몹시 안타까워한다. “숲속으로 걸어가지 못하고 천 일 쪽으로만 걸어갔기 때문에 빚은 아픔”이란 표현이 적절하면서도의 사뭇 시적이라는 생각인데 실제 이 책 곳곳에 시의 향기가 묻어나 있다. 고산골에 다니면서 실용서적 위주 독서에서 시, 소설책을 읽는 쪽으로 습관이 바뀐 것이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저자는 고산골 숲 걷기가 갈등 조정에도 도움을 주었음을 말한다. 저자가 권하는 방법은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하기다. 그러다 보면 내 문제인지 상대방 문제인지 고민하게 되고, 자신의 것은 고치고 상대의 탓이라 하더라도 다르게 대응하는 길을 찾게 된다는 얘기를 들려준다.
고산골을 찾는 한 명 한 명의 사정도 다 다르지만 또 크게 다르지 않은 것도 같다. 고산골을 찾는 60대 주부는 약수터 위 잣나무 단지에서 시간을 좀 더 보내기 위해서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이후로 이전의 독서 효과와는 다른 삶의 치유 능력을 경험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가족과 주변 문제의 갈등을 지혜롭게 해결해나가면서 삶의 여유를 찾게 된 것이다. 질병에 대한 면역력과 스트레스에 대한 저항력을 키우는 피톤치드의 영향에다 책(그 분에겐 책이지만 사람마다 다를 수 있을 것이라고 함)이 섞여서 놀라운 변화를 가져다 준 것이 아닐까 저자는 그렇게 진단한다.
이 책의 가장 마음에 드는 구절은 “고산골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가진 건 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역시 고산골이 최고의 해결사이다”라고 말하는 대목이다. 과유불급과 불광불급 사이에 균형을 잡고 싶은 저자이지만 하루 두 시간 매일 숲을 찾는 것도, 책을 쓰는 것도 그 순간만은 얼마쯤 미쳐야 하고, 그런 중에 이건 내 몫이야 라고 말하는 허세(?)도 부릴 줄 알아야 함을 배우게 된다.
저자의 숲속 걷기 20년, 30년을 빌어주면서 나 역시, 탁구 10년 차 되면, 탁구 시 한 편은 더 써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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